마흔 살의 시/문정희
숫자는 시보다도 정직한 것이었다
마흔살이 되니
서른아홉 어제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하늘의 모가지가
갑자기 명주솜처럼
축 처지는 거라든가
황국화 꽃잎 흩어진
장례식에 가서
검은 사진테 속에
고인 대신 나를 넣어놓고
끝없이 나를 울다 오는 거라든가
심술이 나는 것도 아닌데 심술이 나고
겁이 나는 것도 아닌데 겁이 나고 비겁하게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잊기를 새로 시작하는 거라든가.
마흔살이 되니
웬일인가?
이제가지 떠돌던
세상의 회색이란 회색
모두 내게로 와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새옷을 예약하는 거라든가
아, 숫자가 내 기를 시든 풀처럼
팍 꺾어놓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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