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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나목의 글밭/시2·다시 부르는 노래

내 신실한 종

라포엠(bluenamok) 2025. 2. 4. 02:18

 

내 신실한 종

 

임현숙  

 

 

발톱을 깎다가 가뭄 든 밭을 보았다

손바닥보다 더 주름진 발바닥

가장 낮은 곳에 엎드려

어둡고 시리고 끈적한 날들을 

무병하게 지나오며

발효된 서사(敍事)가 밭고랑에 꿈틀거린다

딱딱한 바닥과 말랑말랑한 뒤꿈치의

아슬아슬한 첫 입맞춤부터

달과 해의 무게를 버텨내며 다져진 군살이

이따금 티눈으로 샐쭉할 때면 발이 투덜거리곤 했다

잘 나가는 신작로만 맞댄 건 아니었으나

시궁창에 얼굴 비비지 않은 걸 고마워할까

담배 연기 같은 허무를 탐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길까

구수한 맛 미끄럼 치는 주방 바닥

흙냄새 정다운 오솔길과의 만남이

소소한 행복이었음을 기억할까

지금도 까슬한 바닥 위에 맨살로 납작 엎드려

명령을 기다리는 내 신실한 종

내일은 태양과의 맞선을 주선해야겠다.  

 

-림(20250113)

 

https://www.youtube.com/watch?v=EvGYvst6q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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