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나목의 글밭/혼잣말·그리운 날에게

꺼진 불도 다시 보자/강박증

라포엠(bluenamok) 2012. 2. 2. 14:33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안개비 임현숙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보리차를 끓이려 개스불에 주전자를 올려놓았지요 점심 약속이 있었어요 그때까지 시간이 여유가 있어 4살배기 막내를 데리고 은행에 갔어요 은행 볼일을 마치고 나니 약속 시각이 다되었어요 보리차 주전자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곧장 약속 장소로 갔답니다 점심을 먹고 아줌마 수다를 한참 떨고 나서도 생각도 못했어요 집을 나선지 무려 4시간 만에 돌아와 대문을 여는 순간 현관 틈새로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어요 그제야 기억이 났어요 보리차 주전자! 어쩌나.. 집안에 매캐한 연기가 가득하고 주방 개스불 위에서 콩 튀기는 소리를 내며 주전자가 타고 있었지요 불붙기 일보 직전에 돌아왔으니 다행이지 집을 태울 뻔 했답니다 벌렁벌렁하는 심장을 가라앉히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그 후 강박증에 시달렸어요 외출하기 전에 개스불을 확인하고 전기 코드도 돌아보았음에도 불을 껐는지 아닌지 확실치가 않아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했지요 한 번은 차를 타고 30분 정도 가다가 다시 돌려 집으로 왔어요 당연히 꺼져있었지요 주부들은 이와 같은 경험 한 두 번은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곰국 끓이느라 뼈 국물 태우기, 찌개 데우다 잊어버려 태우기 등... 지난여름에는 저녁에 끓인 된장국이 남았길래 상할까 봐 다시 끓인다고 불에 올리고 방에 들어와 딴청을 하다 생각 없이 잠자리에 들었어요 아파트에는 연기가 나면 울리는 경보기가 있어요 잠결에 삐삐 소음이 들려 눈을 떴는데 비몽사몽이어서 처음에는 화재경보가 울리는 줄 알고 아이들을 깨우며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했지요 막내가 눈 비비며 나오더니 연기 경보라 하며 주방을 보더군요 그제야 된장 타는 냄새를 맡았어요 20여분 동안 경보는 울려대고 연기를 선풍기로 몰아내며 아이들은 잔소리를 얼마나 해대는지, 한마디도 못하고 고스란히 들어야 했답니다 이러니 강박증이 사라지기 어렵겠지요? 요즘도 가끔 개스불 위에서 냄비가 지글거릴 때가 있답니다 불장난을 좋아하나 봅니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머릿속에 적어둔 표어입니다. Jan.31,2012 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