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달팽이 (외 3편)-김사인

라포엠(bluenamok) 2015. 1. 16. 21:03

달팽이 (외 3편)

 

  김사인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 낱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도적굴로 붙들려간 옛적 누이거나

평생 앞 못 보던 외조부의 골방이라고도 하지만,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 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標章)처럼

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

 

 

 

바짝 붙어서다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뻬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벽에 바짝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목포

 

 

 

배는 뜰 수 없다 하고

여관 따뜻한 아랫목에 엎드려

꿈결인 듯 통통배 소리 듣는다.

그 곁으로 끼룩거리며 몰려다닐 갈매기들을 떠올린다.

희고 둥근 배와 붉은 두 발들

그 희고 둥글고 붉은 것들을 뒤에 남기고

햇빛 잘게 부서지는 난바다 쪽

내 졸음의 통통배는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멀어져간다.

 

옛 애인은 그런데 이 겨울을 잘 건너고 있을까.

묵은 서랍이나 뒤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헐렁한 도꾸리는 입고

희고 둥근 배로 엎드려 테레비를 보다가

붉은 입술 속을 드러낸 채 흰 목을 젖히고 깔깔 웃고 있을지도.

갈매기의 활강처럼 달고 매끄러운 생각들

아내가 알면 혼쭐이 나겠지.

참으려 애쓰다가 끝내 수저를 내려놓고

방문을 탁 닫고 들어갈 게 뻔하지만,

옛날 애인은 잘 있는가

늙어가며 문득 생각키는 것이, 아내여 꼭 나쁘달 일인가.

 

밖에는 바람 많아 배가 못 뜬다는데

유달산 밑 상보만한 창문은 햇빛으로 고요하고

나는 이렇게 환한 자부럼 사이로 물길을 낸다.

시린 하늘과 겨울 바다 저쪽

우이도 후박나무숲까지는 가야 하리라.

이제는 허리가 굵어져 한결 든든할 잠의 복판을

저 통통배를 타고 꼭 한번은 가닿아야 하리라

코와 귀가 발갛게 얼어서라도.

 

 

 

미안한 일

 

 

 

개구리 한 마리가 가부좌하고

튀어나오도록 눈을 부라리며 상체를 내 쪽으로 쑥 내밀고

울대를 꿀럭거린다.

 

뭐라고 성을 내며 따지는 게 틀림없는데

 

둔해 알아먹지 못하고

멋쩍은 나는 뒷목만 긁는다

눈만 꿈벅거린다 늙은 두꺼비처럼.

 

 

 

                       —시집『어린 당나귀 곁에서』(2015)

-------------

김사인 / 1956년 충북 보은 출생. 대전고, 서울대 국문과 졸업. 1981년 《시와 경제》동인으로 참여. 시집 『밤에 쓰는 편지』『가만히 좋아하는』『어린 당나귀 곁에서』등.

'시인의 향기 > 나물 한 바구니(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숙 / 김사인   (0) 2015.01.16
김사인 시모음  (0) 2015.01.16
당신과 나의 겨울  (0) 2014.12.12
깊어간다는 것  (0) 2014.11.04
당신/김용택, 들국화/나태주  (0) 2014.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