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외 3편)
김사인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 낱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도적굴로 붙들려간 옛적 누이거나
평생 앞 못 보던 외조부의 골방이라고도 하지만,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 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標章)처럼
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
바짝 붙어서다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뻬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벽에 바짝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목포
배는 뜰 수 없다 하고
여관 따뜻한 아랫목에 엎드려
꿈결인 듯 통통배 소리 듣는다.
그 곁으로 끼룩거리며 몰려다닐 갈매기들을 떠올린다.
희고 둥근 배와 붉은 두 발들
그 희고 둥글고 붉은 것들을 뒤에 남기고
햇빛 잘게 부서지는 난바다 쪽
내 졸음의 통통배는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멀어져간다.
옛 애인은 그런데 이 겨울을 잘 건너고 있을까.
묵은 서랍이나 뒤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헐렁한 도꾸리는 입고
희고 둥근 배로 엎드려 테레비를 보다가
붉은 입술 속을 드러낸 채 흰 목을 젖히고 깔깔 웃고 있을지도.
갈매기의 활강처럼 달고 매끄러운 생각들
아내가 알면 혼쭐이 나겠지.
참으려 애쓰다가 끝내 수저를 내려놓고
방문을 탁 닫고 들어갈 게 뻔하지만,
옛날 애인은 잘 있는가
늙어가며 문득 생각키는 것이, 아내여 꼭 나쁘달 일인가.
밖에는 바람 많아 배가 못 뜬다는데
유달산 밑 상보만한 창문은 햇빛으로 고요하고
나는 이렇게 환한 자부럼 사이로 물길을 낸다.
시린 하늘과 겨울 바다 저쪽
우이도 후박나무숲까지는 가야 하리라.
이제는 허리가 굵어져 한결 든든할 잠의 복판을
저 통통배를 타고 꼭 한번은 가닿아야 하리라
코와 귀가 발갛게 얼어서라도.
미안한 일
개구리 한 마리가 가부좌하고
튀어나오도록 눈을 부라리며 상체를 내 쪽으로 쑥 내밀고
울대를 꿀럭거린다.
뭐라고 성을 내며 따지는 게 틀림없는데
둔해 알아먹지 못하고
멋쩍은 나는 뒷목만 긁는다
눈만 꿈벅거린다 늙은 두꺼비처럼.
—시집『어린 당나귀 곁에서』(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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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1956년 충북 보은 출생. 대전고, 서울대 국문과 졸업. 1981년 《시와 경제》동인으로 참여. 시집 『밤에 쓰는 편지』『가만히 좋아하는』『어린 당나귀 곁에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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