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설레었지요 / 황인숙
그때는 밤이 되면
설레어 가만히
집 안에 있을 수 없었지요
어둠이 겹주름 속에
감추었다 꺼내고
감추었다 꺼냈지요, 만물을
바람이 어둠 속을 달리면
나는 삶을 파랗게
느낄 수 있었어요
움직였지요
삶이 움직였지요
빌딩도 가로수도
살금살금 움직였지요
적란운도 숲처럼 움직였지요
나는 만물이 움직이는 것을
자세히 보려고 가끔 발을 멈췄어요
그러면 그들은 움직임을 멈췄어요
그들은 나보다
한 발 뒤에 움직였어요
달린다, 달린다,
움직인다, 움직인다,
우리는 움직임으로 껴안았지요
그때는 밤이 되면
설레어 가만히
집 안에 있을 수 없었어요
바람이 어둠 속을 달립니다
전신이 팔다리예요
바람이 자기의 달림을
내 몸이 느끼도록
어둠 속에서 망토를 펄럭입니다
나는 집 안에서
귀기울여 듣습니다
바람은 달립니다
어둠의 겹주름 속을
그때는
밤이 되면
설레어 가만히
집 안에 있을 수
없었지요
황인숙
1958년 서울 출생. 1984년〈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슬픔이 나를 깨운다』『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등.
'시인의 향기 > 바다 한 접시(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겨울 저녁 / 문정희 (0) | 2017.11.25 |
---|---|
나이 / 문정희 (0) | 2017.07.20 |
꿈/ 문정희 (0) | 2016.10.12 |
거위 - 문정희 (0) | 2016.04.27 |
그대 생각 - 고정희 (0) | 2015.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