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침(외 1편)
나희덕
너는 잔에 남은 붉은 포도주를
도로에 다 쏟아버렸다
몇 방울의 피가 가로수에 섞이고
유리조각들이 아침 햇살에 다시 부서졌다
빛의 쐐기들이 눈에 박혔다
핏자국마다 이슬이 섞여
잠시 네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오래전 너와 함께 듣던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른 풀 위로 난 바퀴 자국,
황급히 생을 이탈한 곡선이 화인처럼 찍힌 아침
몇 가지 소지품이 우리에게 인도되었다
외투와 시계와 주민등록증과 휴대전화와 십자가 목걸이가
네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전부였다
우리는 복도에 우두커니 앉아
너의 부재 증명을 기다렸다
정말 너는 사라진 것인지,
그들이 발급해준 서류를 믿을 수가 없었다
사체보관실 문이 열리고
너는 침대에 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외투는 입고 가렴,
네가 가야 할 먼 길이 추울지도 모르니
내 것이 아닌 그 땅 위에
주춧돌을 어디에 놓을까
여기쯤에 집을 앉히는 게 좋겠군
지붕은 무엇으로 얹을까
벽은 아이보리색이 무난하겠지
저 회화나무가 잘 보이게
남쪽으로 커다란 창을 내야겠어
동백숲으로 이어진 뒤뜰에는 쪽문을 내야지
그 옆엔 자그마한 연못을 팔 거야
곡괭이를 어디 두었더라
돌담에는 마삭줄이나 능소화를 올려야지
앞마당에는 무슨 꽃들을 심을까
대문에서 현관까지 자갈을 깔면 어떨까
저 은행나무 그늘에는
나무 의자를 하나 놓아야지
식탁은 둥글고 큼지막한 게 좋겠어
오늘도 집을 짓는다
내 것이 아닌 그 땅 위에, 허공에
생각은 돌담을 넘어
집터 주위를 다람쥐처럼 드나든다
집을 이렇게 앉혀보고 저렇게 앉혀보고
벽돌을 수없이 쌓았다 허물며
마음으로는 백 번도 넘게 그 집에 살아보았다
그러나 내 것이 아닌 그 땅에는
이미 다른 풀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지 않은가
—시집『말들이 돌아오는 시간』(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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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1989년 〈중앙일보〉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야생사과』『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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