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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 창작의 비법은 없다 - 따뜻한 가슴으로 사물을 보라/박재삼

라포엠(bluenamok) 2012. 10. 7. 00:21

 

(5) 시 창작의 비법은 없다 - 따뜻한 가슴으로 사물을 보라 - 박재삼

5. 따뜻한 가슴으로 사물을 보라



"시인은 꾀꼬리처럼 어둠 속에서 그 고독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를 부르며 사람들을 위로 해준다."라고 영국의 시인 셸리는 말했다.
우리는 셸리의 이 말 속에서 시인의 가슴이 어떠해야 하며,

시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세상과 인간을 향한 따뜻한 사랑과 위로로써
우리들의 아픔과 슬픔을 어루만지는 자리에 시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한다.
나는 시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사랑을

모성적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성적 사랑은 모든 사랑의 근원이다.
아무런 조건과 이해타산 없이 순수하게 자신이 지닌 것들을
내어 주며 한없이 베풀어주는 사랑이다.
생명이 지닌 상처들을 기꺼이 감싸안고 포용하는 그 융숭한 사랑이야말로
사랑이 지닌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며, 이런 사랑의 실체가 곧 우리들 어머니이다.
그래서 모성적 사랑은 우리 인류에게 영원한 지표요. 신앙이요. 구원이다.
결코 어떤 무엇으로도 훼손될 수 없는 사랑의 원형이다.
우리가 어머니를 회귀하고 싶은 영원한 고향으로 여기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시속에서도 이러한 모성적 사랑이 근원적으로 흐르고 있다.
왜냐하면 시는 뭇 생명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안타까움의 노래이자,
생명을 위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성이 모든 생명을 탄생시키는 생명의 원천이며,

그것들을 품고 기르는 위대한 창조성의 본(本)인 것처럼

시 역시 온갖 사물들을 품으면서 그것들이 지닌 의미와 아름다움을

새롭게 창조해 내는 것이므로 모성과 시는 그 본질에서 서로 통한다.
그러므로 시를 창작하려는 사람이라면 어머니의 가슴이 되어

세상과 사물을 넉넉하고 깊게 포용할 줄 알아야 하고,

여기에 인간으로서 지닌 지순한 사랑도 담아야 하는 것이다.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 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린것들은
내 앞에서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젖이 차 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오면
지금쯤 내 어린것은
얼마나 젖이 그리울까
울면서 젖을 짜 버리던 생각이 문득 난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난만한 그 눈동자,
너를 떠나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고
갈 수도 없다고
나는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하, 물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떼

-나희덕, <어린 것>



다람쥐 새끼를 보고도 젖이 도는 어머니의 마음이 곧 시인의 마음이다.
이것은 동시에 모든 생명을 향해 열려있는 뜨겁고 깊은 사랑이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내 앞에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나를 어미라 부르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그것들에게 젖을 물릴 수 있어야하며,

극한 상황에 처해있는 "송사리떼"에게도 애타는 모성의 눈빛을 반짝여야 한다.

비정하고 차가운 마음은 사물과 교감할 수가 없다.
아울러 뭇 생명들이 지닌 희열과 비극도 감지해낼 수가 없다.
우리로 하여금 한 인간에게 가장 깊이 가 닿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랑인 것처럼
사물 역시 사랑만이 그들의 가장 내밀한 세계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시인을 통하여 시를 쓴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서로 사랑의 교환을 원한다.
비록 영성이 깃들이지 않은 무생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시의 궁극적인 모습은 이러한 생명들에게 주는 사랑의 노래다.
시인은 이것들을 가슴에 품고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뭇 생명 속에 내재한
슬픔과 사랑을 느끼지도 못한다면 그건 시인이라고 할 수가 없다.
따뜻한 가슴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라. 그리고 안아 보라. 시는 영원한 모성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