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지 (외 2편)
—가정법원, 여자의 진술
최은묵
나는 벽에 달라붙어 살았다
움켜쥔 손톱은 짓물렀고 등은 시렸다
이제 나는 지치고 늙어
그만 벽에서 내려오려 한다
지금껏 나는 혼자 단단한 줄 알았으니
못에 뚫린 자리는 비로소 바람에 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건 구멍이 아니라 들판이다
내 몸에서 벽화처럼 굳어가던 문양(文樣)의 나비들이
저녁 해를 따라 떼 지어 날아가고, 들판은 점점 커지고
풀칠되지 않은 노을처럼 나는 너그럽게 주름진다
나는 벽을 떠난다
벽과 멀어진 이만큼으로 가볍게
나비가 앞선 들길로 간다
바람이 지나가면 길을 내주고, 잠시 멈춘 거기에 앉아
벽에 붙어 피곤했을 다리를 오래 주무를 것이다
딱딱하게 살았던 날들을 들판에 널고
천천히 데울 것이다
구두를 벗다
수염은 뭔가 말을 하려고 밤새 입 주변에서 자랐다 아이는 면도기 속에 수염을 먹고 사는 곤충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전기면도기 보호망 속에서 먼저 살았던 부스러기들을 하수구에 털어낸다
어제 짐을 싸던 손에 청하던 김 과장의 악수는 어색했고, 오늘 구두 대신 아내 몰래 신은 운동화 밑창이 그러하다
발바닥이 낯설다 버스 정류장은 운동화로 바뀐 걸음을 알아보지 못했다 정류장을 지나 전에는 열려 있었을 하천을 걸었다
굴속을 흐르던 아침이 한꺼번에 입 냄새를 쏟아내는 복개가 끝난 하천 수풀 옆
은밀히 따뜻했을, 버려진 좌변기가 더럭 구멍 난 옆구리로 방귀를 뿜는 중년의 끝자락
살을 비집고 나온 수염이 말을 한다 아내가 듣기 전에 전기면도기에 살고 있는 곤충이 토독토독 수염을 먹어치운다
땅의 문
터진 신발 밑창에서 땅과 연결된 문을 발견했다
발을 움직이자 나무뿌리 틈으로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지냈으니 눌린 것들의 소란은 도무지 위로 오르지 못했던 거다
나무 밑동이 전해주는 야사(野史)나, 자식들 몰래 내뱉는 어머니의 한숨, 대개 이런 소리들은 바닥으로 깔리는데
누워야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퇴적층의 화석처럼 생생하게 굳어버린,
이따금, 죽음을 맞는 돼지의 비명처럼 높이 솟구치는,
발자국을 잃고 주저앉은 소리들
소나무는 자신이 들은 소리를 잎으로 콕콕 찍어 땅속에 저장하고
땅에 발자국 한 번 남기지 못한 채 지워진 태아는 소리의 젖을 먹고 나무가 된다는 걸, 당신은 알까
낡은 라디오 잡음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 뿌리 곁에
밑창 터진 신발을 내려놓았다
서서히 땅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오래된 소리들을 다 비워낸 문은 새로운 이야기로 층층이 굳어지고
나무들은 땅 속에 입을 둔 채 소리들의 발자국으로 배를 채울 것이다
—시집『괜찮아』(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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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묵 / 1967년 대전 출생. 2007년 《월간문학》신인상으로 등단. 시집『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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