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고정희 시 모음

라포엠(bluenamok) 2014. 2. 3. 13:30

시인 고정희 

인물사진 
고정희 전 시인
출생-사망
1948년 (전라남도 해남) - 1991년 6월 9일
가족
5남 3녀 중 첫째
학력
한신대학교 학사
데뷔
1975년 현대시학 등단
수상
1983년 대한민국 문학상
경력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
관련정보
네이버<오늘의 문학> -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 고정희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 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둘 수는 없습니다

 

 

관계 / 고정희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 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 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히끗히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사십대 / 고정희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아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연가(戀歌) / 고정희


아픈 머리에 열이 가라앉고
창마다 환하게 불빛 고이는 저녁
겨울 난롯불에 내 혼을 쬐며 고린도전서 13장을 펴면
내 진실의 계단 어디쯤서 너는 오고 있는가
어둠을 쓰러뜨리며 난롯불은 조금씩 내 피를 뎁히고
꿈틀이며 꿈틀이며 타고 있는 글자들


구름이 가는 곳을 묻고 싶은 황혼쯤
엉겅퀴 울타리를 밟고 가는 바람처럼
내 안에 서걱이는 한 무더기 공허
한 무더기 공허로도 비칠 수 없는 얼굴
불심지 휘감아도 살속 캄캄한 어둠 목구멍을 채우네


지구 가득 부신 햇빛 부려놓고
노을을 물들이는 태양이여,
산마루 넘어가는 태양이여,
눈은 눈으로 구름은 구름으로 떠나고 있을 때
나무들 우쭐대는 진종일 바람은 바람으로 만나고 있을 때
내 깊은 눈물샘 어디쯤서 물그르매
물그르매 번쩍이는 너

 

 

사랑법 첫째 / 고정희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쓸쓸한 날의 연가 / 고정희


내 흉곽에
외로움의 지도 한 장 그려지는 날이면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봄 여름 가을 겨울 편지를 쓰네
갈비뼈에 철썩이는 외로움으로는
그대 간절하다 새벽 편지를 쓰고
허파에 숭숭한 외로움으로는
그대 그립다 안부 편지를 쓰고
간에 들고나는 외로움으로는
아직 그대 기다린다 저녁 편지를 쓰네
때론 비유법으로 혹은 직설법으로
그대 사랑해 꽃도장을 찍은 뒤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부치네
비오는 날은 비오는 소리 편에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는 소리 편에
아침에 부치고
저녁에도 부치네
아아 그때마다 누가 보냈을까
이 세상 지나가는 기차표 한 장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네

 


그대 생각 / 고정희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대 쓸쓸함에 다가갔다가 그 쓸쓸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내가 돌아오는 발걸음을 멈췄을 때, 내 긴 그림자를 아련히 광내며 강 하나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거리에서 휘감고온 바람을 벗었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이쁜 은방울꽃 하나가 바람결에 은방울을 달랑달랑 흔들며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후 이 세상 적시는 모든 강물은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서는 내 뒷모습으로 뒷모습으로 흘렀습니다

 

 

포옹 / 고정희


사랑하는 사람이여 세모난 사람이나 네모난 사람이나
둥근 사람이나 제각기의 영혼 속에 촛불 하나씩 타오르는
이유 올리브 꽃잎으로 뚝뚝 지는 밤입니다

 

 

묵상 / 고정희


잔설이 분분한 겨울 아침에
출근버스에 기대앉아
그대 계신 쪽이거니 시선을 보내면
언제나
적막한 산천이 거기 놓여 있습니다
고향처럼 머나먼 곳을 향하여
차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나와 엇갈리는 수십 개의 들길이
무심하라 무심하라 고함치기도 하고
차와 엇갈리는 수만 가닥 바람이
떠나라 떠나거라 떠나거라......
차창에 하얀 성에를 끼웁니다
나는 가까스로 성에를 긁어내고 다시
당신 오는 쪽이거니 가슴을 열면
언제나 거기
끝모를 쓸쓸함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운무에 가리운 나지막한 야산들이
희미한 햇빛에 습기 말리는 아침,
무막한 슬픔으로 비어 있는
저 들판이
내게 오는 당신 마음 같아서
나는 웬지 눈물이 납니다

 

 

오매, 미친년 오네 / 고정희
―프라하의 봄·8

                      

오매, 미친년 오네
넋나간 오월 미친년 오네
쓸쓸한 쓸쓸한 미친년 오네
산발한 미친년 오네
젖가슴 도려낸 미친년 오네
눈물 핏물 뒤집어쓴 미친년 오네
옷고름 뜯겨진 미친년
사방에서 돌맞은 미친년
돌맞아 팔다리 까진 미친년
쓸개 콩팥 빼놓은 미친년 오네
오오 오월 미친년 오네
히, 히, 하느님께 삿대질하며
하늘의 동맥에다 칼을 꽂는 미친년
내일을 믿지 않는 미친년 오네
까맣게 새까맣게 잊혀진 미친년
이미 사망신고 마친 미친년
두 눈에 쌍불 켠 미친년 오네
철철철 피 흐르는 미친년
아무것도 무섭잖은 맨발의 미친년
아무것도 걸리잖는 미친년 오네


<누가 당하나>
사지에 미친 기운 불끈불끈 솟아
한 손에 횃불 들고
한 손에 조선낫 들고
수천 마리 유령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허접쓰레기들 훠이훠이 불사르러
허수아비 잡풀들 싹둑싹둑 자르러
오 무서운 미친년
위험스런 미친년 달려 오네
(여엉자야, 수운자야…… 미친년 온다
문단속 해라…… 이럴 땐 ××이 제일이니라)

 


즈믄가람 걸린 달하 / 고정희
―여성사연구 1

                           

절간을 지으러, 정자를 지으러,
나랏님 연희마당 누각을 지으러
충렬왕조 남정네들 노역에 나간 뒤
모화관 조공이며 식솔들 풀칠이란
고려여자 살가죽 벗기는 짐이라지만
목숨 부지하기까진 여자도 사람인지라
석달째 노역에 동원된 남편이
이웃동기 밥동냥에 의지하고 있다 하여
소첩 백방으로 길을 찾다가
겨우 한끼 밥잔치 마련하여 갔더이다
놀란 남편은 대뜸 윽박질렀지요
가세가 빈한하여 도리없는 노릇인즉
뉘에 몸을 팔았는가 혹여 도둑질인가
꿈엔들 여보, 막말은 하지 마오
가난도 절통한데 누구와 눈맞추며
천성에 없는 흑심 도둑질이 웬말이오
하나 남은 머리채를 잘라 팔았소이다
이 말에 올라가던 수저를 내려놓고
목메어 등돌리던 이웃동기들이시여
밤이 이슥토록 강둑을 걸을 때는
들건너 창호지 불빛 아래 포효하는
다듬이소리로 울부짖었나이다
홍두깨소리로 울부짖었나이다
날 잡숴 날 잡숴
길쌈하는 여자들 뒤통수 내리치는
잉아소리, 베틀소리로 부르짖었나이다
즈믄가람 걸린 달하
서방정토 관음보살님전 뵈옵거든
시방세계 가위눌린 여자생애
천지개벽 원왕생 아뢰주오

 

 

우리들의 아기는 살아 있는 기도라네 / 고정희


밤과 낮 오고가는 이 세계는
하늘과 땅으로 짝지어졌다네
하늘과 땅은 서로 한몸 이루어
곡식과 나무와 들풀을 키우며
생명을 이어가는 원으로 산다네


하늘과 땅의 원 속에서
한 아기가 태어나네
아기는 자라서 무엇이 될까
딸은 자라서 처녀가 되고
처녀는 훗날 어머니가 된다네
아들은 자라서 총각이 되고
총각은 훗날 아버지가 된다네
사람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되지만
여자와 남자 한몸 이루어
그리움 이어받는 원으로 산다네


보시오
그리움의 胎에서 미래의 아기들이 태어나네
그들은 자라서 무엇이 될까
우리들의 아기는 살아 있는 기도라네
딸과 아들로 어우러진 아기들이여
우리 아기에게
해가 되라 하게, 해로 솟을 것이네
별이 되라 하게, 별로 빛날 것이네
우리 아기에게
희망이 되라 하게, 희망으로 떠오를 것이네
그러나 우리 아기에게
폭군이 되라 하면 폭군이 되고
인형이 되라 하면 인형이 되고
절망이 되라 하면 절망이 될 것이네, 오
우리들의 아기는 살아 있는 기도라네


길이 되라 하면 길이 되고
감옥이 되라 하면 감옥이 되고
노리개가 되라 하면 노리개가 되기까지
무럭무럭 자라는 아기들이여
그러나,
여자 남자 함께 가는 이 세상은
누구나 우주의 주인으로
태어난다네
누구나 이 땅의 주인으로
걸어갈 수 있다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지울 수 없는 얼굴 /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뱀과 여자 / 고정희
―역사란 무엇인가 · 1

                      

강남의 술집은 음습하고 황량했다
얼굴에 '정력'을 써붙인 사람들이
발정한 개처럼 낑낑대는 자정,
적막강산 같은 어둠 속에서
여자는 알몸의 실오라길 벗었다
강남 일대가 따라 옷을 벗었다


아득히 솟은 여자의 유방과
아련히 빛나는 강남의 누드 위로
당당하게
말좆 같은 뱀이 기어올랐다
소름을 번쩍이며
좆도 아닌 것이
좆 같은 뻣뻣함으로
여자의 젖무덤을 어루만지고
강남의 목아지를 감아 흐느적이고
여자의 입에 혀를 널름거리고
강남의 등허리를 기어내리고
태초의 낙원
여자의 무성한 아랫도리에 닿아
독재자처럼 치솟은 대가리를
강남의 아름다운 자궁에 박았다
여자는 나지막한 비명을 지르고
강남의 불빛이 일시에 꺼졌다


적막강산 같은 무덤 속에서
해골뿐인 남자가 비루하게 속삭였다


뱀은 남자의 좆이야
이브의 유혹도 최초의 좆이었지


해골들이 하하 쳐드는 술잔에
뱀의 정액이 넘쳐 흘렀다
도처에 페스트가 들끓고 있었다
강남의 흡혈귀가 조용히 웃었다


놔먹인 땅에 이제 칼과 창이 필요했다
아무데나 기어드는 뱀의 대가리에
휙 휙 내리치는 해방의 칼
하얗게 빛나는 흡혈귀의 아가리에
쭉쭉 꽂히는 자유의 죽창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 / 고정희
―외경읽기

                                 

어린 딸들이 받아쓰는 훈육 노트에는
여자가 되어라
여자가 되어라…… 씌어 있다
어린 딸들이 여자가 되기 위해
손발에 돋은 날개를 자르는 동안
여자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발톱이 된다


일하는 여자들이 받아쓰는 교양강좌 노트에는
직장의 꽃이 되어라
일터의 꽃이 되어라 …… 씌어 있다
일터의 여자들이 꽃이 되기 위해
손톱을 자르고 리본을 꽂고
얼굴에 지분을 바르는 동안
꽃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이빨이 된다 
신부들이 받아쓰는 주부교실 가훈에는
사랑의 여신이 되어라
일부종신의 여신이 되어라 …… 씌어 있다
신부들이 사랑의 여신이 되기 위해
콩나물을 다듬고 새우튀김을 만들고 저잣거리를 헤매는 동안
사랑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기상이 된다
철학이 여자를 불러 사자가 되고
권력이 여자를 불러 사자가 되고
종교가 여자를 불러 사자로 둔갑한다


그리하여 여자가 되는 것은
한 마리 살진 사자와 사는 일이다?
여자가 되는 것은
두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 옆에 잠들고
여자가 되는 것은
세 마리 네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새끼를 낳는 일이다?
그러니 여자여
그대 여자 되는 것을 거부한다면
사자의 발톱은 평화?
사자의 이빨은 고요?
사자의 기상은 열반?

 

 

손이 여덟 개인 신의 아내와 나눈 대화 / 고정희
―외경읽기

                                         

어느 먼 나라 힌두교 대사원에 갔다가 그곳에서
손이 여덟 개인 신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문득,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우리 나라 어머니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지나가는 말로 수작을 걸었습니다


여덟 손을 가진 신의 아내여
빛나는 신들의 시대,
백포도주로 강을 넘치게 하고
떠오르는 보름달을 그 위에 멈추게 하던 신의 시대에서도
여자는 일하는 어머니였습니까 아니면
임신과 출산의 기계였습니까

신들은 이마에 땀을 내지 않지만
백성의 마음으로 들어가야 한답니다
내 남편 위시누는 머리가 넷이지요
동서남북 백성을 점지하기 때문이고
내 팔이 여덟임은
사면팔방 백성들의 마음을 보살피기 때문이랍니다
생기복덕 발원하는 백성들을
훈육하고 다스리고 먹이고 잠재우고
축복하고 일으키고 싸매주고 위로하는 일이란
신의 아내가 담당하는 것이지요
남편 위시누는 통치를 주관하고
나는 그 내조를 책임졌답니다


아하, 공―사 역할 분리가 당신 시대 것이군요
지금도 그 일을 하고 계십니까?


파리나 날리고 있답니다
세속의 남자들이 대권에 골몰하고
그 여자들이 내조에 서원하니
우리는 속세에서 버림받았답니다
신들은 사원에 갇힌 신세랍니다


신이 버림받은 시대
인간 승리 시대를 어떻게 보십니까?


오고 있는 역사는 언제나 개벽세상이고
와 있는 역사는 언제나 남자세상이었으니
이제 평등하지 않은 것은 종래 버림받겠지요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 고정희


고요하여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무심히 지나는 출근버스 속에서도
추운 이들 곁에
따뜻한 차 한잔 끓는 것이 보이고


울렁거려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여수 앞바다 오동도쯤에서
춘설 속의 적동백 화드득
화드득 툭 터지는 소리 들리고


눈물겨워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동성에서 날아온 제비들
쓸쓸한 처마, 폐허의 처마 밑에
자유의 둥지
사랑의 둥지
부드러운 혁명의 둥지
하나 둘 트는 것이 보이고

 


매맞는 하느님 / 고정희
―여성사연구 4

                  

깡마른 여자가 처마 밑에서
술취한 사내에게 매를 맞고 있다
머리채를 끌리고 옷을 찢기면서
회오리바람처럼 나동그라지면서
음모의 진구렁에 붙박혀
증오의 최루탄을 갈비뼈에 맞고 있다
속수무책의 달빛과 마주하여
짐승처럼 노예처럼 곤봉을 맞고 있다


여자 속에 든 어머니가 매를 맞는다
여자 속에 든 아버지가 매를 맞고 쓰러진다
여자 속에 든 형제자매지간이 매 맞고 쓰러지며 피를 흘린다
여자 속에 든 할머니가 매 맞고 쓰러지고
피 흘리며 비수를 꽂는다
여자 속에 든 하느님이
매 맞고 쓰러지고 피 흘리며 비수를 꽂고 윽 하고 죽는다
여자 속에 든 한 나라의 뿌리가
매 맞고 피흘리고 비수를 꽂으며 윽 하고 죽는다


깊은 밤 사내는 폭력의 이불 밑에 잠들고
세상도 따라들어가 잠들고
오뉴월 한서린 여자의 넋 속에서
분노의 바이러스가 꽃처럼 피어나
무지개 빛깔로
이 지상의 모든 평화를 잠그고 있다
아아 하늘의 씨를 말리고 있다

 

 

여자가 뭉치면 새 세상 된다네 / 고정희


남자가 모여서 지배를 낳고
지배가 모여서 전쟁을 낳고
전쟁이 모여서 억압세상 낳았지


여자가 뭉치면 무엇이 되나?
여자가 뭉치면 사랑을 낳는다네


모든 여자는 생명을 낳네
모든 생명은 자유를 낳네
모든 자유는 해방을 낳네
모든 해방은 평화를 낳네
모든 평화는 살림을 낳네
모든 살림은 평등을 낳네
모든 평등은 행복을 낳는다네


여자가 뭉치면 무엇이 되나?
여자가 뭉치면 새 세상 된다네

'시인의 향기 > 바다 한 접시(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 처음 만났을 때/문정희  (0) 2014.02.14
관계/고정희  (0) 2014.02.03
러브 호텔  (0) 2014.01.03
첼로처럼  (0) 2014.01.03
  (0) 2014.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