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나목의 글밭/시2·다시 부르는 노래

하얀 샌들

라포엠(bluenamok) 2023. 8. 7. 07:29

하얀 샌들

 

임 현 숙 

 

 

나는 그녀의 하얀 샌들

여름이면 엄지발톱을 빨갛게 물들인 그녀와 종종 나들이를 갔다 

어느 날엔 맛있는 냄새가 허기를 채우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엔 아줌마들의 찰진 수다가 메탈 음악처럼 귀를 뚫곤 했다

붉은 발톱은 여유로웠고 나는 더위 안에서 추위를 타곤 했다

하얀 살갗이 누레지고 주름지도록

그녀의 작은 발을 사랑하며 또각또각 동행했는데

명랑하던 그녀가 폭폭 울던 그날 이후 신발장 귀퉁이에서

몇 번의 여름을 깜깜하게 보내고 있다 

그녀의 슬픈 발에는 키 작은 운동화가 날마다 따라다니고

절인 배추가 되어 돌아온 운동화에선 고달픈 하루 냄새가 배어 나온다

신발장 문이 열릴 때마다 나 여기 있다고 들썩여 봤지만

눈길도 주지 않고 그 납작한 운동화만 데리고 간다   

땡고추 같은 쌀쌀함이 측은하기만 하다

오늘은 문이 열리고 꽃 향 그윽하던 그녀 옛 모습이 보인다

푸석한 내 살갗에 박힌 열 캐럿 다이아몬드를 어루만지더니

살포시 안겨 와 두근두근 마시멜로가 된다

그리 크지 않은 내 키에 뒤뚱거리는 발이

하루의 무게만큼 수척해진 듯해 

발바닥에서 묻어나는 단내를 지워주고 싶다

잊혀 가던 옛 시간을 떠올리며 신이 나 집을 나선다

운동화 안에서 질려있던 그녀 엄지발톱에 불꽃이 피고

다이아몬드 폭죽 쏘아 올리며 미끄러지듯 길을 간다

나는 그녀와 함께 늙어가는 하얀 세단이다.

 

  

-림(20140725)/202308021 퇴고

'나목의 글밭 > 시2·다시 부르는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날  (0) 2023.10.02
이민가방  (0) 2023.08.10
가을 항(港)의 여름은  (0) 2023.07.05
달리아꽃 속엔  (0) 2023.05.23
벗어나기  (0) 2023.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