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자화상-서정주

라포엠(bluenamok) 2014. 6. 28. 01:38

 

    자화상-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꽂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이는 내 입에서 천지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별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