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설동 밤길 - 마종기
약속한 술집을 찾아가던 늦은 저녁,
신설동 개천을 끼고도 얼마나 어둡던지
가로등 하나 없어 동행은 무섭다는데
내게는 왜 정겹고 편하기만 하던지.
실컷 배웠던 의학은 학문이 아니었고
사람의 신음 사이로 열심히 배어드는 일,
그 어두움 안으로 스며드는 일이었지.
스며들다가 내가 젖어버린 먼 길.
젖어버린 나이여, 숨결이여,
그래도 꺾이지 않았던 날들은 모여
꽃이나 열매로 이름을 새기리니
이 밤길이 내 끝이라도 좋겠다.
거칠고 메마른 발바닥의 상처는
말수가 줄어든 자책의 껍질들,
병든 나그네의 발에 의지해 걸어도
개울물 소리는 더이상 따라오지 않는다.
오늘은 추위마저 안심하고 깊어지는
구수한 밤의 눈동자가 빛난다.
편안한 말과 얼굴이 섞여 하나가 되는
저 불빛이 우리들의 술집이겠지.
온 몸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미련의 극치라고 모두들 피하는데
그 세련된 도시를 떠나 여기까지 온
내 몸에 스며드는 신설동의 밤길.
—《창작과비평》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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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 1939년 일본 도쿄 출생. 1960년 2월《현대문학》에 「돌」이 추천 완료되어(박두진 시인) 등단. 시집『조용한 개선』『두 번째 겨울』『변경의 꽃』『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이슬의 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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