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문태준/맨발 외

라포엠(bluenamok) 2013. 7. 22. 12:51

 

 

 - 문태준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95년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94년『문예중앙』신인문학상에 시 「處署」외 9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함.
시집『수런거리는 뒤란』『맨발』 등이 있음.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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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내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 (현대시학 2004년 9월호)
- (도서출판 작가 '2005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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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런거리는 뒤란


山竹 사이에 앉아 장닭이 웁니다
묵은 독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 애처롭습니다
구들장 같은 구름들은 이 저녁 족보만큼 길고 두텁습니다
누가 바람을 빚어낼까요
서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산죽의 뒷머리를 긁습니다
산죽도 내 마음도 소란해졌습니다
바람이 잦으면 산죽도 사람처럼 둥글게 등이 굽어질까요
어둠이, 흔들리는 댓잎 뒷꿈치에 별을 하나 박아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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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다 깬 새벽에
아픈 어머니 생각이
절박하다

내 어릴 적
눈에 검불이 들어갔을 때
찬물로 입을 헹궈
내 눈동자를
내 혼을
가장 부드러운 살로
혀로
핥아주시던

붉은 아궁이 앞에서
조속조속 졸 때에도
구들에서 굴뚝까지
당신의 눈에
불이 지나가고

칠석이면
두 손으로 곱게 빌던
그 돌부처가
이제는 당신의 눈동자로
들어앉아서

어느 생애에
내가 당신에게
목숨을 받지 않아서
무정한 참빗이라도 될까

어느 생애에야
내 혀가
그 돌 같은
눈동자를 다 쓸어낼까

목을 빼고 천천히
울고, 울어서
젖은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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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잠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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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언(默言)"


절마당에 모란이 화사히 피어나고 있었다
누가 저 꽃의 문을 열고 있나

꽃이 꽃잎을 여는 것은 묵언

피어나는 꽃잎에 아침 나절 내내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말하려는 순간 혀를 끊는



- 詩集(창비시선ㆍ238)
『 맨 발』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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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호흡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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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적인


가령 사람들이 변을 보려 묻어둔 단지, 구더기들, 똥장군들.
그런 것들 옆에 퍼질러앉은 저 소 좀 봐,
배 쪽으로 느린 몸을 몰고 가면 되새김질로 살아나는 소리들.
쟁기질하는 소리, 흙들이 마른 몸을 뒤집는.
워, 워, 검은 터널을 빠져나오느라 주인이 길 끝에서 당기는 소리.
원통의 굴뚝에서 텅 빈 마당으로 밀물지는 쇠죽 연기.
그러나 不歸, 不歸! 시간은 사그라드는 잿더미에 묻어둔 감자 같은 것.
족제비가 낯선 자를 경계하는 빈, 빈집에 들어서면
녹슨 작두에 무언가 올리고 싶은, 도시 회고적인 저 소 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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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정밭에서


찾아가고 싶다 밭 가운데 무너지는 무덤, 마른 수풀 비석
세우고 이승으로 내려와도 더운밥 한술 뜨지 못하는 당신을
만나고 싶다 산에서 내려온 질경이 아카시아 들쥐에게 온몸
내주는 그대의 이력을 얘기해주오 볕바른 산중턱, 이속의 억
수비에도 물길 걱정 없는 그곳 버려두었으니 당신의 한평 누
운 자리는 허물어지는 목, 들일과 당신이 부린 집짐승과 농
사 일지를 기억해주오 서러울 것 없다 바람 얌전하고 亡者
여, 이 세상 저물녘에 둥근 집으로 지고 들어간 것은 무엇입
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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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 같은 그리움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조개처럼 아주 천천히
뻘흙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돌로 풀을
눌러놓았었다는 얘기

그 풀들이 돌을 슬쩍슬쩍 밀어올리고 있다는 얘기

풀들이 물컹물컹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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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맞는 두릅나무


산에는 고사리밭이 넓어지고 고사리 그늘이 깊어지고
늙은네 빠진 이빨 같던 두릅나무에 새순이 돋아, 하늘에
가까워져 히, 웃음이 번지겠다
산 것들이 제 무릎뼈를 주욱 펴는 봄밤 봄비다
저러다 봄 가면 뼈마디가 쑤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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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1


흙더버기 빗길 떠나간 당신의 자리 같았습니다 둘 데 없는
내 마음이 헌 신발들처럼 남아 바람도 들이고 비도 맞았습니
다 다시 지필 수 없을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으면 방고래
무너져내려 피지 못하는 불씨들

종이로 바른 창 위로 바람이 손가락을 세워 구멍을 냅니다
우리가 한때 부리로 지푸라기를 물어다 지은 그 기억의 집
장대바람에 허물어집니다 하지만 오랜 후에 당신이 돌아와
서 나란히 앉아 있는 장독들을 보신다면, 그 안에 고여 곰팡
이 슨 내 기다림을 보신다면 그래, 그래 닳고 닳은 싸리비를
들고 험한 마당 후련하게 쓸어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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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나니가 건넨 말


초승달을 저만치 걸어두고
무덤에서 반 썩은 열 되 남짓 내 송장이
걸어가는 사람의 발을 이 밤에 잡아 채거든 오랜 습관으로 알 것
삼신밥을 올리는 점쟁이로 알 것
산 사람이 귀양간들 탱자나무 안
세월이야 봉창 뚫린 집에 한 사나흘 묵었다 가지
마음은 허허벌판에 쏟아지는 우레 같은 것
주리틀수록 외로워지는 것
거미줄을 걷고 빈집의 문간 드나들며 방칸 수나 이따금 세어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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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오기


논배미에서 산그림자를 딛고 서서
꿈쩍도 않는
늙은 따오기
늙은 따오기의 몸에 깊은 생각이 머물다 지나가는 것이 보입니다
어느날 내가 빈 못을 오도카니 바라보았듯이
쓸쓸함이 머물다 가는 모습은 저런 것일까요
산그림자가 서서히 따오기의 발목을 흥건하게 적시는 저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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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돌


마룻바닥에 큰 대자로 누운 농투사니 아재의 복숭아뼈 같다
동구에 앉아 주름으로 칭칭 몸을 둘러세운 늙은 팽나무 같다
죽은 돌들끼리 쌓아올린 서러운 돌탑 같다
가을 털갈이를 하는 우리집 새끼 밴 염소 같다
사랑을 잃은 이에게 녹두꽃 같은 눈물을 고이게 할 것 같다
그런 맷돌을, 더는 이 세상에서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내
외할머니가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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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 날


못자리 무논에 산그림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물처럼
한 사람이 그리운 날 있으니

게눈처럼, 봄나무에 새순이 올라오는 것 같은 오후
자목련을 넋 놓고 바라본다

우리가 믿었던 중심은 사실 중심이 아니었을지도
저 수많은 작고 여린 순들이 봄나무에게 중심이듯
환약처럼 뭉친 것만이 중심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그리움이 누구 하나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아닌지 모른다
물빛처럼 평등한 옛날 얼굴들이
꽃나무를 보는 오후에
나를 눈물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믐밤 흙길을 혼자 걸어갈 때 어둠의 중심은 모두 평등하듯
어느 하나의 물이 산그림자를 무논으로 끌고 갈 수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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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궁전


목련화가 하늘궁전을 지어놓았다
궁전에는 낮밤 음악이 냇물처럼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생사 없이 돌옷을 입고 평화롭다

목련화가 사흘째 피어 있다
봄은 다시 돌아왔지만 꽃은 더 나이도 들지 않고 피어 있다
눈썹만 한 높이로 궁전이 떠 있다
이 궁전에는 수문장이 없고 누구나 오가는 데 자유롭다

어릴 적 돌나물을 무쳐먹던 늦은 저녁밥때에는
앞마당 가득 한 사발 하얀 고봉밥으로 환한 목련나무에게 가고 싶었다
목련화 하늘궁전에 가 이레쯤 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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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복숭아나무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
처음 맺히는 열매는 거친 풀밭에 묶인 소의 둥근 눈알을 닮아갔다
후일에는 기구하게 폭삭 익었다
윗집에 살던 어름한 형도 이 나무를 참 좋아했다
숫기 없는 나도 이 나무를 좋아했다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
마을로 내려오면 사람들 살아가는 게 별반 이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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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다리 위에서


풀섶에는 둥근 둥지를 지어놓은 들쥐의 집이 있고
나무 다리 아래에는 수초와 물고기의 집인 여울이 있다

아아 집들은 뭉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높고 쓸쓸하고 흐른다

나무 다리 위에서 나는 세월을 번역할 수 없고
흘러간 세월을 얻을 수도 없다

입동 지나고 차가운 물고기들은 생강처럼 매운 그림자를 끌고
내 눈에서 눈으로 여울이 흐르듯이
한 근심에서 흘러오는 근심으로 힘겹게 재를 넘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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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려 할 때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 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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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지는 순간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
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사발에 넣어 부드
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
고 구중중하던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어두워지려는 때에는 개도 있고, 멧새도 있고, 아카시
아 흰 꽃도 있고, 호미도 있고, 마당에 서 있는 나도 있
고...... 그 모든 게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늑대처럼 오래 울고, 멧새는 여울처럼 울고, 아카
시아 흰 꽃은 쌀밥덩어리처럼 매달려 있고, 호미는 밭에
서 돌아와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마당에 선 나는 죽
은 갈치처럼 어디에라도 영원히 눕고 싶고...... 그 모든
게 달리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다른 개의 배에서 머무르다 태어나서 성장하다
지금은 새끼를 밴 것이고, 멧새는 좁쌀처럼 울다가 조약
돌처럼 울다가 지금은 여울처럼 우는 멧새이고, 아카시
아 흰 꽃은 여러 날 찬밥을 푹 쪄서 흰 천에 쏟아놓은 아
카시아 흰 꽃이고...... 그 모든 게 이력이 있어서 나는 기
록할 수 없네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베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이상하지, 오늘은 어머니가 이것들을 다 버무려서
-서당골에서 내려오면서 개도 멧새도 아카시아 흰 꽃도
호미도 마당에 선 나도 한사발에 넣고 다 버무려서, 그
모든 시간들도 한꺼번에 다 버무려서
-어머니가 옆구리에 산미나리를 쪄 안고 집으로 돌아왔
을 때 세상이 다 어두워졌네


*( ' - '은 행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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