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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의 시 해설/ 생활제재의 비극화와 회고적 연애의 상상-공광규

라포엠(bluenamok) 2014. 8. 15. 13:48

 

해설/ 생활제재의 비극화와 회고적 연애의 상상


                                                                    공광규 시인



  문숙의 시는 간명한 표현과 해독 가능한 쉬운 내용을 특징으로 한다. 최근 문단에 발표되는 난해하거나 번잡한, 기괴한 표현이 문숙 시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오래전 공자가 말한, 뜻이 통하는 표현이 중요하다는 사달(辭達)과 수식보다 진실이 더 우선이라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의 전통시관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1) 또한 문숙 시는 유형화나 계열화가 쉽다. 문숙이 강조하는 가치의 중심과 지향성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어, 일관된 세계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 이는 문숙 작품에 대한 애정을 기울이게 하는 힘이자, 미래에 발표될 작품에 거는 기대이다.


1. 일상 생활제재의 서정화


  문숙의 시를 훑어보면서 가장 먼저 유형화, 계열화 하고 싶다는 충동을 일으킨 것은 일상 생활제재의 시들이다. 주부 생활 일상을 제재로 채용한 시들이 거의 시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는 생활 일상 가까이에 있는 사물을 대상으로 하여 체험과 느낌을 강조하는 창작태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늙은 고무장갑> <어머니> <치약 껍데기> <항아리> <단추> <새우튀김> <버선코> <소화기> <수건> <페트병> <마늘> <자리를 고쳐 앉는다는 것> <낡은 장롱> <부부> <금간 화분> <나무도마> 같은 작품들이다.


손이 빠져나간 홀쭉한 장갑

장독 위에 걸쳐 있다

모든 움직임은 멎은 지 오래

누군가의 빛바랜 껍질

텅 빈 몸을 만져본다

빛은 독이었다

탱탱하던 전신이 찐득하다

한 사람을 기억하며 보낸 세월

그만 자신을 허물고 싶은 걸까

쩍쩍 달라붙어 놓지 않는다

제 살점을 헐어

여기저기 붉은 지문을 찍고 있다

물기에 젖어 산 날보다

버려져 말라간 날의 고통을 말하고 있다

                             - <늙은 고무장갑> 전문


  모두 14행의 수작이다. 이 시가 시성을 획득하는 것은 설명이나 설득, 논증 형식의 일상적 언술이 아니라는데 있다. 낡은 고무장갑에 대한 구체적 인상을 감각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하여 시 읽기의 즐거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문숙의 이러한 생활제재 계열의 시들은 견딜 수 없이 난잡하고 혼란하고 지겹고 싱거운 시단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청량한 바람과 같아 즐겁다.

  이 시에서 화자는 관찰자이다. 주체는 고무장갑이지만 대상과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관찰자 서술인 것이다. 누가 고무장갑을 벗어 놓은 것이 아니라, 고무장갑에서 “손이 빠져나”갔다는 첫 행부터 시성을 획득하고 있다. 일상에서도 주체이면서 시에서도 주체가 되는 뻔한 진술은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일상에서는 손이 주체이나 시에서는 장갑이 주체다. 손이 빠져나간 채 장독 위에 오래 얹혀 있는 고무장갑은 빛이 바랜다. 이 빛이 바랜 고무장갑은 “누군가의 빛바랜 껍질”이며 “텅 빈 몸”이라며 인격화를 하고 있다.

  6행에서 화자는 고무장갑에게 “빛은 독”이라고 단언한다. 상식적으로 빛이 독이 될 수는 없다. 빛은 물, 공기와 함께 생명의 기본요소이다. 그러므로 이는 상식의 위반이다. 그래서 시 읽기의 충격이 있다. 물론 탄성을 유지해야 하는 고무류의 화학제품은 빛이 독이라는 게 일반상식이다. 그럼에도 독자가 고무장갑에게 햇빛이 나쁘다는 상식적 정보를 생각하기도 전에, 빛이 독이라는 단언을 듣는 것은 아무래도 충격을 준다. 표현의 낯설음 때문이다. 시에서 낯설음을 독자를 매혹시키는데 중요하다. “탱탱하던 전신이 찐득하다”는 육체적 감각은 관능적이다. 찐득찐득한 늙은 몸의 관능을 연상하는 이 시행은 앞에서 육체감각화한 “홀쭉한 장갑”이나 “빛바랜 껍질” “텅 빈 몸”과 어울려 비극성을 발아한다.

  8행의 “한 사람을 기억하며 보낸 세월”은 햇빛에 낡은 고무장갑의 비유이기도 하지만 창작자인 시인이 화자를 통해 시 속에 개입해 들어가는 ‘시인 자신의 이야기’로 오해하여 읽을 수도 있다. 늙은 장갑을 통해 창작자의 심정이 투입, 발효된다는 오해이다. 김소월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창작자와 화자는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작품의 내용과 시인의 삶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지만 독자는 창작자에게도 한 사람을 기억하며 보낸 세월이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짐작과 오해를 통해 시에 흥미를 갖는다. 그럼에도 창작자는 작품 속에 창작자 자신을 약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작품은 곧 시인 자신이라는 말이 있다. 이 욕망의 정도는 독자가 읽어내는 정도에 따라 다르다.

  9행과 10행은 화자의 관찰적 감상이다. 문맥상 두 행은 도치되어 있다. 도치는 정서적인 반응의 강도를 드러내기 위하여 시에서 많이 사용하는 수사법이다. 햇빛에 녹은 고무장갑이 장독에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현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쩍쩍’이라는 의태어가 사실성을 더해준다. 11행 12행의 살점을 헐어 붉은 지문을 찍는다는 비유는 비극의 극화이다. 오죽하면 살점을 헐어버리겠는가?

  13행 14행에 오면, 이 시가 버려진 고무장갑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한 사람의 비극적 인생을 비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독자가 창작자의 전략을 알아차릴 때 시 읽기의 즐거움은 배가된다. 훔쳐보는, 알아내는 기쁨일 것이다. 어차피 글은 무엇인가를 의미하고 전달하기 위해 쓴다. 물론 언어에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을 다 담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창작자는 의미하고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한다. 이 글이 은근하게 비유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한 인물의 일생이다. 비유되는 인물의 삶은 ‘물기’가 없는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이다. 작품이 곧 시인 자신이라고 오해한다면, 창작자 자신이나 창작자의 어머니, 또는 창작자의 현재적 심리상태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시 <어머니>는 “부엌 천정에 매달린 형광등”을 제재로 가져와 시를 발아시키며, <치약 껍데기>는 생활용품인 치약을 다 쓰고 난 껍데기에서 시를 발아시키고 있다. 다 사용한 치약 껍데기로 한 남성 노동자의 죽음을 비유한다. <항아리> 역시 주부 일상에 가까이 있는 항아리와 관상용 꽃 심기의 체험에서 우려낸 작품이다.


된장을 담아두던 항아리에

모래를 깔고 물을 부어 스킨딥시스를 심었다

제 몸에 꽃을 담고도

여전히 된장 냄새를 피운다

자주 물을 갈아도

노랗게 꽃잎이 타들어간다

단지를 들어내자

항아리 밑이 된장물로 흥건하다

짜디짠 눈물이 고였다.

숨구멍으로

제 몸에 담았던 한 흔적을

조금씩 몸 밖으로 버리고 있었던 항아리

한 사람의 기억을 버리려

숨 죽여 울던 저 여자

                             - <항아리> 전문


  모두 14행의 이 시 역시 생활제재를 형상화한 수작이다. 이 시는 된장을 담았던 항아리에 관상용 화초를 심은 일화를 토대로 하고 있다. 1행과 2행은 화자의 단순한 행위이다. 단순 서술문에 불과한 두 행으로 된 한 문장에서 우리는 시성을 느낄 수 없다. 아무런 비유나 시적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의 상황을 전개하기 위하여, 사건을 발단시키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등장시키는 인물들과 같다. 3행과 4행에 와서야 시적 장치에 걸려든다. 꽃과 된장은 잘 어울리지 않는 대조 개념을 가지고 있다. 제 몸에 꽃을 담고도 된장냄새를 피운다는 표현은 내용이 모순 된다. 몸에 꽃을 담은 사람은 꽃향기를 피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꽃을 담았지만 된장 냄새를 피운다고 말해버린다. 이 모순적 진술은 독자의 관심을 끌게 된다. 관심이 끌린다는 것은 창작자가 설치한 올무에 독자가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5행 6행은 된장을 담았던 항아리의 본성이 잘 변하지 않음을 물을 자주 갈아도 “꽃잎이 타들어간다”는 표현으로 진술한다. 7행 8행의 사건을 통해서 본성이 잘 변하지 않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한다. 단지를 들어내고 보니 항아리 밑에 된장물이 고여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창작자는 그걸 짜디짠 눈물로 비유한다. 된장물이 눈물이라니. 이러한 의인화를 보고, 여기쯤에서 독자는 항아리가 어떤 인간의 속성임을 환기할 것이다. 그 항아리는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본성이자 자아인 제 몸에 배었던 된장냄새를 지워가며 조금씩 몸을 바꾼다. 시의 마지막 두 행에 와서는 항아리를 ‘저 여자’로 인격화한다. 항아리를 갑자기 여자로 환치시키는 언술을 만나면서 독자는 충격을 갖게 된다. 항아리는 “한 사람의 기억을” 지우려고 “숨죽여 울던” 창작자의 경험적 내면일까? 시가 곧 시인이라는 오해를 믿는다면 그럴 수도 있다.

  <단추>는 장롱 밑에서 먼지에 싸여있다 나온 단추를 통하여 회상하는 형식의 시이다. 아무리 좋은 추억과 기억이라도 생활 속에 묻혀 잊혀진다는 것을 단추를 통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버려진 종이컵>은 일회용으로 사용되다 아무렇게나 구겨져서 버려지는 종이컵의 일생을, <새우튀김>은 새우튀김을 하면서 변화하는 새우의 외형을 시적으로 변용시키고 있다. 일상을 시적 제재로 채취하여 형상화 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바다를 버리고서야 몸을 쭉 폈다

단단한 껍질을 벗고

노란 삼베옷을 입고 기름 속으로 뛰어든다

뜨거움이 스미자

육신에 남아있는 생의 관성으로

바싹 몸을 옹그린다

                             - <새우튀김> 부분


  인용한 시에서도 확인되지만, 버리다, 껍질, 옹그리다(웅크리다)는 문숙의 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어휘이다. 요리를 하면서, 요리의 일상에서 생의 비극성을 환기해내는 창작자의 관찰력과 상상력이 뛰어나다.

  <버선코>는 버선을 통하여 “답답함을 따스함이라 믿고 산” 어머니의 일생을 비유하고 있다. 고무장갑, 항아리, 단추와 마찬가지로 버선은 아직까지 여성과 친숙한 생활용품이다. <수건>에서는 몸을 감쌌다가 아무렇게나 내던져지는 젖은 수건을 통하여 딸과 화자 자신과 어머니의 관계를 환유시키고 있다. <페트병>에서는 내용물을 다 쏟아내어 쓸모없어진 페트병이 길바닥에 버려져 뒹구는 것을 제재로 가져와 “자신을 꼿꼿하게 세우는 일”이 누군가를 가슴에 가득히 품고 견디는 일이라고 한다.


열무김치를 담그며

빈 김치통 뚜껑을 연다

파김치를 담았던 통에

아리게 배어있는 냄새

함께 어우러져 곰삭은

시간이 담겨 있다

물로도 헹궈지지 않는다

한동안

파김치 냄새로 울렁거린다

                             - <흔적> 전문


  문숙 시의 장점과 특징이 잘 나타나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간명한 시이다. 일상을 제재로 한 다른 시들도 그렇지만 대상을 묘사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내용이 잘 들어온다. 이 시의 창작자는 김치를 담으면서 일어난 단순한 행위를 시제로 포착하여 인간사의 이야기로 비유 확장시킨다. 남녀를 불문하고 가사노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여 본 사람이라면, 김치를 담았던 빈 그릇에서 나는 냄새를 맡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창작자는 이러한 경험에 상상력을 발휘하여 한편의 시를 제작한 것이다. 이 시에서 핵심 문장은 “함께 어우러져 곰삭은 / 시간”이다. 화자는 파김치를 담았던 그릇에서 나는, 잘 헹궈지지 않는 냄새를 통하여 함께 어우러져 곰삭은 시간을 보낸 사람의 냄새를 환기한다. 그 냄새는 화자의 기억에 아리게 배어 속을 한동안 울렁거리게 한다.  

  <우산>은 강의실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녹슨 우산을 여성화자로 인격화하여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홀로 놓여진 여성화자의 심리는 누군가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진 생물학적으로 소외된, 마음을 스스로 닫아걸고 있는 “한 사람의 지문으로 얼룩진 그녀”이다. <마늘>은 말라가는 마늘을 인격화 하고 있다. 마늘이 말라서 푸석한 껍질만 남은 상황을 ‘해탈’로 묘파하고 있다. <낡은 장롱>은 골목에 버려져 비를 맞고 있는 낡은 장롱과 좁은 어깨의 한 여자를 병치시켜 비유하고 있다. <나무도마>에서는 칼자국이 난 도마의 상처를 통해 “식구들의 허기를 채우던 아버지”의 힘겨운 삶을 환기한다.

  이렇게 문숙은 일상과 가까이 있는 생활용품, 특히 주부와 가까이 있는 사물을 제재로 채택한 시에서 높은 시적 성취를 이루어낸다. 시의 대상이 되는 사물은 대개 인격화 되며, 인간사와 병치되어 비유된다. 병치비유는 비유를 이루는 두 개의 요소 사이에 독특한 정서를 환기한다. 또한 대상을 간명하게 묘사하는 창작자의 특기가 생활소재의 시에서 위용을 과시한다. 표현에 무리가 없어 내용이 쉽고 잘 읽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2. 부정과 비극의 정서화

   

  문숙의 시에는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분위기의 정서가 속출한다. 부정과 비극의 정서는 창작자의 외적 삶과는 달리, 현상을 부정하거나 비극으로 보려는 내면심리 반영일 경우가 있다. 그의 수작인 <늙은 고무장갑>에서는 부정적 심상이 두드러진다. ‘늙은 고무장갑’이라는 제목에서부터 홀쭉한 장갑, 빛바랜 껍질, 텅 빈 몸, 독, 허물고, 헐어, 버려져 등의 어휘가 부정적 정서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부정적 어휘의 다발적 사용은 “물기에 젖어 산 날보다 / 버려져 말라간 날의 고통을 말하고 있다”며 마지막 두 행에서 비극적으로 극화된다. 다음의 <어머니> 역시 부정과 비극의 심상으로 가득 차 있다.



부엌 천정에 매달린 형광등

스위치를 당겨도 쉽게 스파크가 일지 않는다

빛이 다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남아 깜박거린다

하얗던 몸속으로 검은 시간이 스민다


양 모서리가 캄캄해져 온다

긴 시간 나를 굽어보며

내 모퉁이를 환하게 비추던 한 생애가

속절없이 저물고 있다

                             - <어머니> 전문


  인용한 2연 8행의 시는 부엌 천정에 매달린 스파크가 잘 일지 않는 형광등을 소재로 하여 어머니의 생애를 비유한다. 어머니는 곧 형광등이고, 낡은 형광등은 속절없이 늙어가는 어머니인 것이다. ‘어머니’라는 제목, 그리고 낡은 형광등의 현상이 본문에 진술되면서 제목과 본문의 내용이 폭력적으로 결합되어 시성을 획득한다. 오래된 형광등은 스파크가 쉽게 일지 않는다. 깜박거리다 만다. 늙은 어머니의 몸 같다. 필라멘트가 있는 부분은 검게 타들어간다. 이러한 오래된 형광등의 현상은 늙은 어머니의 “몸속으로 검은 시간이 스미는 것”으로 비유된다. 오랫동안 화자의 외면을 굽어보며 환하게 비추어왔던 것은 형광등이나, 내면을 환하게 비추어왔던 것은 어머니인 것이다. 외면과 내면, 낡아가는 형광등과 늙어가는 어머니를 병치하여 비유한다.

  <치약 껍데기>도 어느 가장인 남성노동자의 ‘가벼운’ 죽음을 환유하는 부정과 비극으로 가득한 시이다. 다 사용하여 쓸모없어진 치약껍데기의 버려짐을 통해 자신의 내용물을 다 내주고 죽어간 가장을 비유한다.


납작해진 치약을 짜고 또 짠다

부풀었던 몸

바짓단처럼 말려있다

마알간 향기도 지워지고

선명하던 이름도

뭉개져 희미하다.


(생략)


알맹이가 모두 빠져나가

뚜껑 없이 내던져진 치약 껍데기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 <치약 껍데기> 부분


  모두 3연으로 된 시의 1연과 3연을 인용해본다. 내용의 비극성은 물론이려니와 지워지고, 뭉개져 희미하다, 구겨지다, 밀려다니다, 추락, 빠져나가, 내던져진, 껍데기, 쓰레기통에 버려지다 등 부정적 어휘로 가득하다. “납작해진 치약을 짜고 또 짠다”는 노동자를 최대한 쥐어짜는 자본주의 생산구조, 생계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자본주의의 체제의 비극적 속성을 암시한다. 자신의 몸을 사용할 만큼 사용하고도 더 사용해야 하는 가장의 비극이 문맥에 숨어서 도사리고 있다.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얽매여 인간의 본성을 잃어가는, 소외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이 바짓단처럼 말려있다거나 말간 향기가 지워진다거나, 선명하던 이름이 뭉개져 가는 등 인간의 정체성을 읽어버리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다 3연에서 자신을 다 소모하고 세상에서 내팽개쳐져 죽어가는 인간을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치약껍데기에 비유한다.

  문숙의 시에서 부정과 비극성은 <금간 화분>에서 더욱 처연하게 나타난다. 한때 무리 없이 아이들과 좋은 집에서 잘 살았던 엄마이자 여성의 가난하고 비극적인 현재를 우울하게 그려내고 있다.



종일 어둠을 버티고 선 골목

지하방 창틀에 금 간 질화분 하나

속을 텅 비우고 겨울을 나고 있다

누군가를 담아 키운 듯

주위에는 마른 흙이 묻었다

온 몸을 가로지른 지렁이 같은 금


어두컴컴한 지하 셋방에 웅크린 여자

한때는 올망졸망 초롱꽃 같은 새끼를 품고

젖줄을 물리며

백열등이 환한 거실을 받치고 섰던 진호엄마

강 건너 오색 불빛에 이끌려

사이키 조명을 따라돌다

끝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여자

겨울바람에 시들고 있을 아이들을 떠 올리며

문풍지처럼 울고 있다


이젠 아무도 것도 담을 수 없게 된

저 금간 화분

텅 빈 몸속으로 진눈깨비만 내린다

                             -<금간 화분> 전문


  모두 3연 18행으로 된 시다. 1연은 금이 간 화분을 이야기하고 있다. 배경은 종일 어둠이 버티고 선 좁은 골목에 있는 지하방이다. 주거형태가 아주 열악하다. 금방 가난한 삶이 있는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지하방 창틀에 금이 간 질화분이 하나 놓여있다. 그런데 속이 텅 비었다. 거기다 추운 겨울이다. 그 화분의 주변에는 흙이 묻어있다. 누군가를 담아 키운 듯하다고 화자는 추정한다. 화분의 몸에는 지렁이 같은 금이 나있다. 이렇게 1연은 주변에 대한 정황과 금이 간 화분을 묘사하고 있다.

  2연에 와서는 화분이 있는 지하 셋방에 여자가 웅크리고 있음을 서술한다. 2연 1행을 읽어가면서 금이 간 화분이 바로 이 ‘웅크린 여자’를 비유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금이 간 화분과 웅크린 여자는 서로 병치되어 비유된다. 그러면 금이 간 화분과 같은 여자라니? 독자는 여자에게 어떤 사연이 있음을 기대하게 된다. 다음 3행에서 5행 “한 때는 올망졸망 초롱꽃 같은 새끼를 품고 / 젖줄을 물리며 / 백열등이 환한 거실을 받치고 섰던 진호엄마”를 읽어가면서 이 여자가 진호엄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한때’라니. 접두사 ‘한’과 시간인 ‘때’의 결합은 과거의 어느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니, 지금은 이러한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이들도 곁에 없고 백열등이 환한 거실에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하 셋방에서 웅크리며 혼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적 주인공이 어떤 연유로 금간 화분처럼 살고 있는지 정보를 주지 않고 있다. 춤바람을 피우다 가족들로부터 쫓겨났는지, 아니면 가정경제를 위하여 유흥노동에 종사하는 것인지 등. “강 건너 오색 불빛에 이끌려”라는 시행과 “끝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린”이라는 표현을 보면 자발적 유혹과 실수로 가정을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3연에서 화자는 이 여자를 “이젠 아무 것도 담을 수 없게 된” 금이 간 화분이라고 한다. 견고한 창작자의 도덕관이 금간 화분이라는 사물을 통해 형상화 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문숙의 시에는 위에 인용한 시 외에 부정적이고 비극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어휘가 많이 나오는데, 특히 ‘껍데기’류 와 ‘버리다’류 어휘가 지배적이다. ‘껍데기’ ‘껍질’ 등 어휘가 나오는 시와 시행은 <새우튀김>에서 “단단한 껍질을 벗고”, <밤송이>에서 “두어 개 알밤이 빠져나간 껍데기”, <마늘>에서 “푸석한 껍질만 잡힌다” 등이다.

  ‘버리다’류의 어휘를 통해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시와 시행은<늙은 고무장갑>에서 “물기에 젖어 산 날보다 / 버려져 말라간 날의 고통을 말하고 있다”, <항아리>에서 “숨 구멍으로 / 제 몸에 담았던 한 흔적을 / 조금씩 몸 밖으로 버리고 있었던 항아리”, <버려진 종이컵>에서 “구겨 넣은 꽁초 하나 / 얼룩진 몸 안에 버려져 있다”, <새우튀김>에서 “바다를 버리고서야 몸을 쭉 폈다 / (생략) / 조금씩 익어가며 / 구부리고 펴던 기억마저 버리고 있다”, <호화기>에서 “구석진 곳에 차갑게 방치된 채”, <페트병>에서 “가벼움으로 중심을 잃고 / 길바닥에 버려졌네”, <흔들리지 않는 배>에서 “누가 타고 버린 것이냐”, <낡은 장롱>에서 “골목 어귀에 버려진 장롱 하나 / 비를 맞고 있다” 등이다.


  그렇다고 문숙의 시에 부정과 비극의 정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부정과 비극의 상황에서 버팀과 희망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시들도 다수가 보인다. 대부분 민중의 삶을 제재로 한 시들이 그렇다. 시인의 건강한 세계관이 반영되는 사례들이다. <용수 할매>는 비극적 주인공이 안간힘으로 현실을 버티며 사는 가난한 노파의 삶을 적실하게 그려낸다.


리어카를 끌고 오는 용수 할매

가을비는 폐지를 적시며 내리고

길 앞으로 쏟아질 듯 뒤따르는 리어카가

야윈 걸음을 밀고 있다


일찍 자식 앞세우고

어린 손자랑 등 기대며 살던 할매

컴컴한 골목길

휘파람이 휙휙 날던 밤

손자마저 낙과처럼 떨구고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중심을 잃은 채

길처럼 매달렸던 하나님도 놓고

몇 달을 주검처럼 보냈단다


오늘은 저승이라도 끌고 오는지

쉽게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가지 끝에 매달린 가랑잎처럼

리어카 손잡이 움켜잡고

흰 고무신에 담긴

마른 풀잎 같은 다리로

미끌미끌 버티며 오고 있다

                             - <용수 할매> 전문


  모두 3연 20행의 이 시는 독거노인인 할머니의 힘든 노동생활을 형상화하고 있다. 1연에서 시적 주인공인 용수 할머니는 리어카로 폐지를 모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창작자는 화자의 시선을 통해 비가 내려 리어카에 실린 폐지를 적시고, 주인공이 야윈 걸음을 하고 있다며 비극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2연에서는 주인공의 비극적 가족사가 서술된다. 자식은 먼저 죽고, 같이 살던 어린 손자역시 불량배들에게 죽은 것으로 암시된다. 주인공은 이런 팔자 사나운 삶에 절망했던지 다니던 교회도 그만두었다. 행복한 생활을 담보해주지 않는 교회라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겠는가. 3연에서는 주인공이 리어카를 끌고 있는 상황이다. 리어카를 끄는 것은 저승이라도 끄는 것처럼 힘겨우며, 손은 가랑잎처럼 마르고 앙상하다. 다리는 풀잎처럼 가늘고 말랐다. 시에 동원되는 비극적 분위기와 주인공의 비극적 성격이 잘 어울리며 시의 비극적 상황을 잘 연출해내고 있다. 그러한 비극적 삶일지언정 늙은 육체로 현실을 “움켜잡고”, “버티며” 현실을 살아내는 할머니의 삶이 대견하게 보인다.

  <폐광촌의 풍경> 역시 탄광노동자인 남편을 막장에서 잃고 등이 굽은 채 홀로 사는 마을과 노파의 삶을 비극적으로 형상화한다. 화자는 “아직도 연탄을 피워내는 / 구멍이 숭숭난 마을”의 “여기저기 놓인 몇 점 화분”에서 “작은 꿈망울이 피고 있다”고 한다. <산나리가 피는 동네> 역시 가난한 판잣집동네의 비극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좁은 골목과 텃밭이 있고, 낡은 리어카도 있고 돌담도 있고 호박덩굴도 자라는 곳이다. 교회 십자가도 등대처럼 서있다. 이러한 동네에 “둥글게 말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산나리처럼 피고 있다”고 한다. 부정과 비극적 현실에서 긍정과 희망을 보려는 창작자의 안간힘과 형상능력에 믿음이 간다. 



3. 회고적 연애와 관능의 상상


  문숙의 시는 생활제재를 채취하여 형상화하거나 부정과 비극의 정서에 침잠하거나에 상관  없이 연애의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연애는 과거이며 열망일 뿐이지 현재 진행형은 아니다. 그의 연애는 과거의 회상과 현재 욕망이다. 그동안 보아온 빈틈없고 야무진 외모와 대인관계를 생각해볼 때 의외라고 할 수 있다. 몇 개의 시에서 창작자 개인의 외상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연애의 복합심리 반영, 아니면 시적 장치로서 연애의 관념이 어느 상황에서나 의도적으로 발아하고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늙은 고무장갑> 8행에서 “한 사람을 기억하며 보낸 세월”을 읽을 때, 시에서 내적 주인공이 한 사람을 기억하면서 한 자리에서 자기 몸을 헐어내는 늙은 고무장갑처럼 될 때까지 살았구나 하는 감격을 맛본다. <항아리>라는 시의 마지막 부분에 “한 사람의 기억을 버리려 / 숨죽여 울던 저 여자”라는 곳에 이르면, 된장을 담아두었던 항아리에 된장 냄새가 배어 잘 지워지지 않듯이, 자기 몸에 담아두었던 잘 지워지지 않는 상대에 대한 기억을 버리려고 애쓰는 시적 주인공의 슬픔을 맛보게 된다.

  

장롱 밑에 떨어진 단추

어둠에 갇혀

먼지더미에 푹 파묻혀 있다

어느 가슴팍에서 떨어져 나온 것일까


한 사람을 만나

뿌리 깊게 매달렸던 시절을 생각한다

따스하게 앞섶을 여며주며

반짝거리던 날들


춥고 긴 골목을 돌아나오며

한 사람의 생애가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채우다, 끝내

서로를 동여맨 실이 풀려

바닥으로 떨어져버린 단추


세상 밖으로 구르다

먼지를 무덤처럼 뒤집어쓴 채

잊혀진 그대

                             -<단추> 전문


  모두 4연 16행의 이 시는 보잘 것 없이 떨어져 나간 생활제재인 단추를 통하여 연애의 운명성을 이야기한다. 과거의 연애는 현재의 생활에 묻힌다. 언제 떨어져 나갔는지 모르는 단추와 같다. 우리는 이사를 하거나 가구를 옮기다 새삼스럽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단추를 발견하게 된다. 필요할 것 같아 주워서 잘 닦아 두지만 다시 생활 속에서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다. 현재 일상에서는 필요가 없으니 찾지 않게 되는 것이다. 지나간 연애도 그럴 것이다.

  1연에서 화자는 장롱 밑 어둠 속에 갇혀있던 단추를 발견한다. 우연이든 아니든, 창작자가 의도했든 안했든 장롱이라는 낱말의 상징성이 강하다. 장롱은 가정생활의 대표이자 결혼한 여성의 가장 큰 재산목록으로 상징된다. 요즘 아파트에 붙박이장이 있는 경우에는 다르지만, 장롱은 오랫동안 결혼 필수품이었다. 부피도 가장 크거니와 가격도 가장 비쌌다. 떨어진 단추가 장롱 아래 어둠과 먼지더미에 파묻혀 있었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단추를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단추를 발견하면서 화자는 어느 가슴팍에서 떨어져 나왔는지 의구심을 갖는다.

  1연의 의구심은 2연에서 풀어진다. 2연은 연애가 빛났던 시절이다. 그때는 “한 사람을 만나 / 뿌리 깊게 매달렸던 시절”이며, “따스하게 앞섶을 여며주며 / 반짝거리던 날들”이다. 그러다 3연에 와서는 연애의 운명이 도래했음을 알린다. 단추를 “한 사람의 생애가 풀어지지 않도록 / 단단히 채웠지만 “서로를 동여맨 실이 풀려 / 바닥으로” 단추가 떨어져버렸다는 것이다. 4연에서는 “잊혀진 그대”라며 연애가 생활에 묻혀 잊혀졌음을 단언한다. 연애에게 먼지를 뒤집어씌워 망각하게 하는 생활은 정말 냉혹하다. 생활은 연애의 무덤이다. 이미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라고 잠언처럼 말한 사람도 있다.

  연애에게 먼지를 뒤집어씌우고, 연애를 생활의 어둠에 가두어버리는 현실의 냉혹성은 <버려진 종이컵>에서도 재연된다. 창작자의 심리적 대변자일수도 있는 화자는 “버릴 수 있는 것도 사랑이다 / 한 가슴에서 조용히 잎이 지고 있다”고 한다. 시에 연애의 냄새를 숨겨놓기는 하지만 그 냄새를 스스로 가두고 덮어버리는 체념적 연애가 문숙의 시에 보여지는 연애의 상상력이다.


공사 중인 골목길

접근 금지 팻말이 놓여있다

시멘트 포장을 하고

빙 둘러 줄을 쳐놓았다

굳어지기 직전,

누군가 그 선을 넘어와

한 발을 찍고

지나갔다


너였다

                             - <첫사랑> 전문


사랑이란 파내는 일

나를 너만큼


그 자리에 너를

꾹 눌러 심는 일

                             - <나무를 심으며> 전문


  인용한 두 편 모두 사랑의 원리를 간명하게 형상화한 수작이다. 대부분 시멘트길 공사를 하는 곳을 실수로 들어가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거나, 다른 사람이나 짐승들이 찍고 간 발자국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첫사랑>은 이러한 평범한 경험을 기발한 발상으로 첫사랑의 원리를 시화하여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사랑은 접근 금지된 영역을 도발하여 발자국을, 흔적을 가슴에 깊이 남기는 것이다. 도로를 아예 파내고 다시 공사하기 전에는 시멘트에 찍힌 발자국이 없어지지 않는다. 첫사랑의 발자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사람의 뇌가 멈추고 몸이 무덤 속에서 분해되기 전까지는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다.

  <나무를 심으며>는 나를 파내고 상대를 그 자리에 심는 것이 사랑이라는 창작자의 관념이 화자를 통해 구체화 되고 있다. 사랑은 나를 파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상대를 들어앉히는 것이다. 나를 파내는 일은 고통이다. 사랑하는 것은 정말 축제이며 고통스러운 사건이다. 상당히 잠언적인 관념이지만 나무심기라는 구체적 행위에 비유하여 사랑의 원리를 보편화 하고 있다. 이 보편성 획득이 독자의 공감을 준다.

  일상에 묻힌 사랑의 비극적 기억과 체념, 그리고 고통뿐만 아니라 사랑에 대한 희구와 열망도 문숙 시의 도처에 나타난다. <소화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를 잠근 안전핀을 뽑고

내 안을 확인하고 싶어

나만을 태울 수 있는 불길을 만나

한순간의 뜨거움을 향해 확

나를 쏟아버리고 싶어

딱 한번만 숨쉬고 싶어

                             -<소화기> 부분


  소화기를 재제로 하여, 필요할 경우 사용자가 안전핀을 뽑을 때 확 터져 버리는 분말이 내재된 소화기의 속성을 사랑의 속성에 비유하고 있다. 이 시에는 창작자의 열망이 화자를 통해 대리된다. 화자는 딱 한번만이라도 터져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내재하고 있다. 화자는 어디에도 안전지대가 없다고 언명한 뒤, 소화기처럼 구석지고 서늘한 곳에 놓여 먼지만 받고 있는 자신이 녹슬고 있다고 인식한다.

  화자는 자신의 내면에 출렁이는 바다와 같은 생명력과 근원적 폭발성이 있지만, 이것을 외면화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가짜 “고요와 평화”로 인식한다. 가짜 현실은 “내가 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 내가 나를 봤다는 반증이며, 시 창작의 동기와 욕망은 내가 나를 본 순간부터 시작된다. 화자의 “나를 깨우고” “누군가의 손길에 세차게 흔들리고 싶”다는 열망은 자아를 찾으려는 구체적 행위로 표현된다. 나를 잠가왔던 안전핀을 뽑아 자아를 노출시키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출된 자아는 확 쏟아버리고 싶다는 극적인 소망으로 끝날 뿐이지 시 안에서조차 행위로 완결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적 윤리적 외압 현실에 길들여진 창작자의 가짜 자아가 내면의 진짜 자아를 억압하고 짓누르고 있기는 여전하다.

  창작자는 시 <단풍>에서 단풍의 현상을 사랑으로 비유하는데, 화자를 통해 “딱 한번만 저, / 가슴에 감전당하고 싶다”며 연애에 대한 일회적이고 전소적 열망을 진술한다. 시 <징검돌>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만날 수 없는 존재론적인 거리가 있음을,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너를 향해 가고 있는, 저 / 징검돌 같은 마음 하나”라는 거리의 연애를, 내용물이 없을 때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페트병의 현상을 연애의 원리로 포착한 <페트병>에서는 “누군가의 가슴 가득 품고 / 숨 가쁘게 견디는 일임을”이라며 진술한다.

  창작자가 남자와 등을 돌리고 나란히 누워 있다가 창작 동기를 얻은 듯한 <화성>에서 화자는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저 남자 / 육만 년을 거쳐야 다시 / 내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라고 단정한다. 남녀가 마주 누우면 서로 안으로 들어가 거리가 없는 동심일체의 상황이지만, 서로 등을 돌리고 누웠을 때의 거리는 육만 년이라는 시간이 되어야 서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아득한 거리가 존재하게 된다고 한다. 이 밖에 연애적 상상이 가능한 어휘와 시행은 <바퀴의 힘> <꽃사과> <결혼> <라일락 피던 날> <우산> <이별> <낡은 장롱> 등의 시에서도 나타난다.

  연애의 상상에서 가장 시적 성공을 거두는 시는 <부부>이다. 이 시는 좌판 위에 있는 고등어자반을 시적 제재로 포착하여 부부애를 형상화 한 수작이다. 


좌판 위에 고등어자반 한 손

제 속을 버리고 한 쌍이 되었다


한 마리가 가슴을 넓게 벌리고

또 한 마리는 뼈까지 드러내며

바다의 푸른 기억을

서로의 품으로 껴안는다

가슴을 갈라 등을 품는 아픔의 두께


잔물결이 사라진 시간

머리도 비우고 지느러미도 접은 채

서로에게 절여진 고등어 두 마리

그들의 접힌 상처 사이에

허옇게 말라붙은 바다가 보인다

                             -<부부>


  모두 3연 12행의 이 시는 두 쪽으로 나누어 소금 간을 한 고등어자반 두마리를 부부로 착안하여 서술하는데 매력이 있다. 1연에서 부부는 고등어자반처럼 자기의 속을 서로 버려야 한 쌍이 된다는 부부생활의 원리를 암시하고 있다. 2연에서는 배가 갈라져서 벌어진 자반이 서로 껴안는다는 말인데, 그것은 “가슴을 갈라 등을 품는 아픔의 두께”라며 표현의 묘미를 주고 있다. “바다의 푸른 기억”은 기억으로만 가지고 있는 과거의 분명한 생활태도라고 보면 될까? 3연에서는 머리를 비우고 지느러미도 접은, 즉 모든 자기를 포기하고 서로에게 간절한 사이가 되는 부부를 절여진 고등어 두 마리로 암시한다. 그렇다. 부부는 서로 자기를 포기하고 서로에게 절여지는 사이이다. 부부가 서로 껴안는 지점은 상처의 자리이다. 두 개의 나무를 접붙일 때 두 개의 나무에 칼로 상처를 내어 상처 난 자리를 서로 맞붙이듯이. 접힌 고등어의 상처 사이에 말라붙은 바다가 보인다는 상상, 누구나 부부는 맞붙은 상처 사이에 말라붙은 바다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부부관계의 현실이다.

  시인의 눈에 포착된 시의 대상은 때로 관능적 연애의 상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다음의 시들이 그렇다.


소리 없이 스미는 그와

질펀하게 어울려

이 봄에

사랑의 씨앗 하나 배고 싶다

                             -<봄비> 부분


땅 속을 더듬는 불씨들의 아우성

발그레한 황토 한바가지 빌어 객토하고 싶다

                             -<객토> 부분


  가지치기를 하여 끝이 뭉툭한 가로수를 시의 대상으로 삼은 <가로수>에서 화자는 “아랫도리가 흥건”하다고 한다. 자유로를 가면서 만난 전신주와 칡덩굴을 서로 한 몸이라고 상상하는 <통일전망대 가는 길>에서, 화자는 “하늘을 오르는 사랑의 몸짓 / 저 징한 하모니”라고 한다. 정치적 역사적 제재를 관능적 연애의 상상으로 서정화 하는, 문숙 시에서는 보기 드문 경우다.


  이상과 같이 문숙의 시를 일별하면서 일상 생활제재의 서정화, 부정과 비극의 정서화, 회고적 연애와 관능의 상상력으로 유형화, 계열화하여 살펴보았다. 문숙은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 쓰기와 달리 간명한 표현과 쉬운 내용을 특징으로 한다. 그 가운데 일상의 생활제재를 시화한 작품들의 시적 성취가 높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일상 사물은 인격화되며, 사물의 현상을 통해 인간사를 비유한다.

  시의 분위기는 대체로 부정적이고 비극적 정서를 가지고 있다. 버리다, 웅크리다, 껍데기 등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어휘가 그의 시에 다발적으로 발견된다. 그리고 거의가 여성화자이다. 이는 창작자의 내면 심리 반영일 수도 있고 시적 장치일수도 있다. 그러나 몇 개의 작품들에서는 견딤과 희망을 이야기도 한다.

  연애와 관능의 상상력도 보인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화자와 창작자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창작자의 내면에 숨어있는 열망과 생명력이 시적 화자를 통해서 나타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기억의 연애이며 관능이다. 때로 도발성도 보이고 열망도 보이나 현실에서 실현되지는 않는다.

  이외에 늙어가는 심상의 ‘어머니’가 제재로 자주 등장하거나 시의 내용에 창작자 자신으로 보이는 여성 화자의 ‘자아 찾기’가 보인다. 이러한 면들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하겠다. 필자가 문숙 시에 갖는 관심과 애정만큼 해설이 길었다. 문숙 시인의 문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