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전체 글 2819

오래되면

오래되면 나목 임현숙 늙수그레한 용달차 팔팔해 보여도 매일 점검을 해야 해 더 오래된 차는 아직 젊어 좋겠다고 말하지 그래 서른 살 된 차가 보기엔 스무 살은 청년이지 스무 살의 절반은 짐이 깨끗하고 단출해서 날아다녔지 단 한 번의 추돌 사고 후 내 등에 실린 건 쇠붙이였다네 발이 땅에 붙게 버거워 헉헉거리다가도 이 짐이 누군가의 밥이 되고 날개가 된다는 것이 새 원동력이 되었어 언덕을 오를 때면 거북이가 되지만 조금 느리면 어때 심장이 멈출 때까지 달려갈 테야 낡고 긴 터널을 지나며 빛을 향해 뛰어가고 싶은 그 여자 아침마다 오래된 혈관에 윤활유를 붓는다. -림(20220215) 한국문협 부산지부/월간 문학도시2022년 8월호/기획특집/해외 한국문학 수록

겨울비에게

겨울비에게 나목 임 현 숙 겨울비는 줄곧 내리고 창가 의자와 한 몸 되어 무생물이 되어간다 흐린 눈빛이 거리를 내다보면 힘차게 달리는 자동차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장대비 내려 빈 눈빛에 강물이 찰랑대게 해 주렴 번개야 휴화산 심장에 도화선이 돼주렴 천둥아 깊이 잠든 이성을 벌떡 깨워주렴 눈 감으면 떠오르던 먼 그리움 말라버린 눈물조차도 새살처럼 돋아나기를 겨울비여 나는 살아 있고 싶다. -림(20220204)

회상

회상 나목 임 현 숙 눈 오는 밤 거침없이 내리는 저 눈발은 오랜 기억의 편린들 밤이 깊을수록 눈발은 이 가슴 후비고 머언 곳으로부터 날아오는 모스부호 나는 잊었다 했는데 가슴에 묻었다 했는데 슬그머니 나부끼는 청춘의 분홍 깃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새로 태어날 수 있다면 분홍 대신 나만의 파랑길을 걸으리. -림(20211220)

아픔보다 더한 아픔

아픔보다 더한 아픔 나목 임 현 숙 목에 쇠침이 박혔다 설마 했던 그놈이 내게도 들어왔다 대문에 빗장 건 이레간의 보이지 않는 전쟁 마른 갈대 입술을 열면 작렬하는 쇳소리 한솥밥 식구들은 겉보기엔 나이롱환자 망할 균이 흥해서 우쭐대는 중이지만 1차 2차 3차 저항군이 절대 백기는 들지 않을 것 분연히 항거하는 더운 숨소리 아프다 너와 내가 곁눈으로 눈치 보며 저 건너에서 바라만 봐야 하는 것이. -림(20220116)

연말정산

연말정산 나목 임 현 숙 먼 옛날엔 연말이 다가오면 대중목욕탕에서 때 정산을 하곤 했다 그 시절 어머니 손길 그리워 먼 하늘 바라보다 오늘 때밀이 대신 마사지를 받는다 수줍은 첫 경험 미지의 문을 열고 들어서서 나보다 작은 여자의 안내를 받고 탈의 후 엎드려 누워 심호흡하면 깊숙이 밀려오는 라벤더 향기 어제의 모자란 잠이 파도친다 그녀의 작은 손가락들이 피아노를 연주하듯 굴러갈 때마다 뻐근하다고 엄살 부리던 근육이 소리 없는 함성을 지른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세포들에 주는 선물 석화된 마음마저도 마시멜로가 되어 미운 사람을 안아주고 싶어진다 사랑할까 두려운 연말정산이다. -림(20211221)

김치와 손녀

김치와 손녀 나목 임 현 숙 만 네 살인 손녀 가르치지 않아도 한국어와 영어를 구사하는 솜씨가 놀랍다 나랑 한국말로 조잘거리다가 순간 지 아빠와 영어로 재잘거린다 자동 반사하는 그 이쁜 입술이 가끔 날 삐지게도 한다 '할머니 손에서 냄새 나' '어휴 김치 냄새' 손을 깨끗이 씻어도 때로 음식 냄새가 배어있기 마련 냄새 묻은 손으로 주는 음식은 밀어낸다 수십 년 동안 동고동락해온 김치 인이 박인 마약을 손녀와 더 알콩달콩 지내려면 멀리해야 할까. -림(20211210)

가을 기도

가을 기도 임 현 숙 수수하던 이파리 저마다 진한 화장을 하는 이 계절에 나도 한 잎 단풍이 되고 싶다 앙가슴 묵은 체증 삐뚤거리던 발자국 세 치 혀의 오만한 수다 질기고 구린 것들을 붉게 타는 단풍 숲에 태우고 싶다 그리하여 찬란한 옷을 훌훌 벗고 겸손해진 겨울 숲처럼 고요히 고요히 사색에 들어 입은 재갈을 물고 토하는 목소리에 귀담아 오롯이 겸허해지고 싶다 나를 온전히 내려놓아 부름에 선뜻 대답할 수 있기를 겨울이 묵묵히 봄을 준비해 봄이 싱그럽게 재잘거리는 것처럼 나도 무언가의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림(20211022)

그런 날

그런 날 임 현 숙 개미 발소리가 들리는 날 *까똑 소리가 기다려지는 날 딸아이의 귀가를 재촉하는 날 잘 정리된 서랍을 다시 뒤적이는 날 그런 날엔 애꿎은 추억을 벌씌운다 *까똑까똑 말 거는 것이 귀찮은 날 말벗이 되어주는 딸아이가 성가신 날 넋 놓고 있고 싶은 날 그런 날엔 내게 타이른다 산다는 건 낡은 추억을 깁는 게 아니라 싱싱한 추억거리를 짓는 거라고. -림(20210609) *카카오톡 알림 소리

여섯 개의 눈

여섯 개의 눈 임 현 숙 다초점 안경 여섯 개의 눈으로 위로는 멀리 아래론 가까이 숨기고 싶은 주름살 잡티 어제보다 선명하다 뭉뚱그려 보이던 깨알 설명서도 가갸 거겨 확실히 책 속에서 '너'라고 읽은 글자는 '나' '네 탓'이라고 보던 글자는 '내 탓' 눈이 밝아 마음도 맑다 한결 맑아지려 유리 눈을 닦으면 앙큼한 발상이 은근슬쩍 철옹성 네 심상을 들여다보려 눈동자 너머로 까치발 한다. -림(20210526)

봄비 오시네

봄비 오시네 임 현 숙 봄비 오시네 사납게 파고들던 겨울비 저만치 보드라이 흐르는 봄비의 손결 회색빛 마을 화사해지리 다정한 빗살에 파랗게 일어서는 풀 내음 거칠었던 숨 다스리며 나도 한껏 푸르러지리 봄비는 저물녘 마음 강가 도란도란 흐르는 너의 목소리 겨울 그림자 길어진 날엔 새파란 봄비여 어서 오소서. -림(2021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