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없다 / 김사인
내 곁의 여자는 손거울을 꺼내 루즈를 바른다. 맞은편 짧은 치마의 아가씨가 그물스타킹 발을 벗어 구두 위에 얹고 조는 동안, 그 곁 검정 배바지의 50대는 다리를 턱 벌리고 오가는 사람을 아래 위로 훑는다. 손잡이에 매달려 통화에 빨려든 젊은 여성은 배꼽과 허리만 남긴 채 이미 이곳에 없고, 그 앞에서 발을 떨며 문자메세지를 찍어대는 노랑 머리 대학생의 구멍난 청바지 틈엔 허연 살이 아프다.
다들 고향에는 윗대 산소며 큰집 작은집이며 논둑길이며 앞산 밑 개울도 있던, 봄이면 우물가로 앵두꽃도 한철이던, 할아버지는 사랑에서 에에-퉤 하고 위엄있게 가래침도 뱉던 집 자손들이다.
어디서 또 만나겠는가
만나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림자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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