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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나목의 글밭/혼잣말·그리운 날에게

귀여운 말썽꾸러기

라포엠(bluenamok) 2014. 4. 3. 00:23

 

 

 

 

 

귀여운 말썽꾸러기

 

임현숙

 

 

 

 

 

 실수에 관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하루이다. 아이들이 소지품을 잃어버리거나 물컵을 깨뜨리는 사소한 실수에도 잔소리꾼 엄마였는데 오늘은 거꾸로 아이들한테 잔소리를 들었다.

 나는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강박관념이 있어서 평소 생활에서 웬만해선 실수를 하지  않는다. 특히 소지품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세 아이의 눈총 세례를 받는 일이 생겼다.

 

 나는 밴쿠버의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다. 아이들과 외출에서 돌아오며 차를 지하에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입구에 서 있었는데 5층에서 한 사람이 내리길래 조금 비켜서려다 그만 손에 들고 있던 자동차 키를 놓쳤다. 손에서 힘없이 미끄러져 떨어지더니 집으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빠져버렸다. 철퍼덕 지하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큰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모습을 본 외국 남자가 친절하게 관리인 전화번호며 어찌 대처하라고 설명을 해주는데

동양인 부인이 그런 남편의 행동이 거슬렸는지 사람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태도를 조심하라라고 쏘아붙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아마도 여자에게 과잉 친절한 게 싫었던 모양이다. 부부가 연신 토닥거리는 뒷모습을 보며 미안하다기보단 머쓱했다. 별일도 아닌데 공개적으로 남편을 핀잔하는 그녀가 밉살스러웠다.

 보조키가 있기는 하지만 잃어버린 키를 찾으려면 관리인을 만나야 하고 이래저래 귀찮기에

나름 짜증이 나 있었는데 집에 들어오자마자 큰딸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쏘아대는 아이들의 눈초리가 아린 가슴을 마구 찔러댔다. 예전에 아이들이 작은 실수를 했을 때 꾸지람했던 말들이 우박 쏟아지듯 내게 퍼부어졌다.

 나는 소심한 성격이라 큰일은 아니지만 않던 실수를 하고 나니 나이가 들어 그런가 싶어

우울해지려는데 아이들까지 자글대니 속이 상했다.

 

 그 날의 말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작은 넷북을 샀는데 주로 글 쓰는 작업을 하니 가지고 다니기도 편리하고 최신 윈도즈라 작업도 빠르게 되어 넷북 앞에 앉으면 어린애처럼 신이 났다.

 그런데 산 지 이틀 만에 캡처 프로그램을 내려받다 잘못되어 인터넷 창이 뜨는 게 오래 걸리고 작업이 느려졌다.

 처음 설정을 해준 막내아들이 복구하느라 애를 쓰더니 짜증을 내며 핀잔을 했다. 졸지에 엄마는 말썽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조금은 기죽었던 하루였다.

 언제나 아이들 앞에서 당당하던 엄마였는데 꾸중을 하고 듣는 자리가 뒤바뀌어가는 시점인 것 같아 나이가 들어간다는 걸 실감했다.

 개미 기어가는 소리도 들릴 듯 밝던 귀도 조금 작게 말하면 알아듣지 못해 자꾸 되묻는다.

그뿐만 아니라 술술 말하던 말솜씨도 낡아져 더듬거리고 말하려던 초점이 무언지 알쏭달쏭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제 시작이 아닌가 싶다. 점차 순발력도 떨어지고 기억력도 저하되고

 사십 고개를 넘을 때는 막내가 다섯 살이어서 애한테 매달리느라 내 나이를 실감하지 못했다. 불혹이란 나이에 직면한 여느 사람들처럼 바람이 빈 가슴을 울린다든지 이제껏 가정과 자식밖에 안중에 없던 눈에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든지 등등,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는데 이순을 바라보는 비탈길에 서고 보니 사소한 일에도 간이 쪼그라들고 적막한 밤에 홀로 깨어있을 땐 사춘기 소녀처럼 눈물이 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마음이 그렇단 얘기일 것이다. 정신적인 위로의 말이지 실제로 나타나는 현상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진솔하다.

 아침마다 거울 속에 나 아닌 나를 바라본다. 절대 내가 아니라고 우기고 싶은 서릿발 성성한 머리의 중년 여자와 눈을 맞춘다. 내 마음은 아직도 소녀인데 꿈이 깨지는 순간은 서글프다.

 

 노을 비낀 언덕에 서 있는 가을 나무에 큰 바위가 굴러 오고 있다. 피할 수 없고 막을 수도 없이 점점 가속도가 붙어 쿵쿵거리며 달려온다. 언젠간 나무뿌리째 뽑혀 낭떠러지로 구르고 말 것이다. 그러나 뚝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내 이름 석 자는 잊지 말아야 한다. 두려워 오그라드는 어깨를 활짝 펴고 주눅이 든 심장을 펌프질하여 당당히 맞서야 한다.

이제 겨우 생의 절반 고개를 넘지 않았는가.

 천덕꾸러기 아닌 귀여운 말썽꾸러기로 길고 긴 황혼 길을 소녀처럼 하늘의 별을 노래하며 바람처럼 자유로이 날고 싶다.

 

 

 

 

 * 예전에 썼던 글을 수필로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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