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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호 바다건너 글동네 수록/이순에 들다, 12월을 달리며

라포엠(bluenamok) 2019. 9. 7. 14:48

이순耳順에 들다


                                                        임 현 숙




어엿이 내 나이 이순
트로트보다 발라드가 좋고
연인들을 보면 가슴이 벌렁거리는데
거울 속 모습은 할머니 호칭이 어색하지 않다


이순에 들어서니
무심히 버리고 온 것들이 어른거린다
하루가 멀다 붙어 다니던 친구
장흥 골 어느 카페
부부동반 교회 모임
형제처럼 오가던 지인들
뚱뚱보 우리 언니
하물며
아끼던 이쁜 그릇들이며
내 눈물 받아주던 옛집의 능소화까지
추억은 한창 젊고 어여쁘다


이순을 넘어서니
지난날 부끄러운 기억을 꼬집고
미안하다 미안하다 빌고 싶다
비로소 철이 드는지
성을 묻는 문서에 그냥 사람이라 적고 싶어진다
 
이순이란 나이는
그리운 것들과 뜨겁게 재회하며
여자 아닌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문


그 문을 넘어서면 사람답게 살아야 하리.



-림(20171218)




12월을 달리며


                                                       임 현 숙


 


한 세월의 종착역입니다
시간의 나래에서 베짱이처럼 지내던 날을 지우며
이마를 낮춰 손끝에 가시가 돋고
발목이 가늘어지도록 달려왔습니다


대못이 박히고 무릎 꺾는 날도 있었지만
발자국마다 반성문을 각인한 후 
낡은 지갑은 늘 배가 고파도
철든 눈동자엔 겁 없는 미소가 찰랑댑니다


겨울나무처럼 허울을 벗고 나니
어느 별에 홀로 떨어져도 삽을 들겠노라고
앙상한 발가락이 박차를 가합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새봄이 오지 않는다 해도
해쓱한 볼이 터지라 웃으며 달리렵니다.



-림(2014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