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시월/기형도 외

라포엠(bluenamok) 2013. 10. 2. 00:42

 
  10월 / R. Frost 
오, 고요하고 부드러운 시월의 아침이여,
너의 잎새들은 곱게 단풍이 들어 곧 떨어질 듯하구나
만일 내일의 바람이 매섭다면
너의 잎새는 모두 떨어지고 말겠지
까마귀들이 숲에서 울고
내일이면 무리 지어 날아가겠지
오, 고요하고 부드러운 시월의 아침이여
오늘은 천천히 전개하여라
하루가 덜 짧아 보이도록 하라
속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의 마음을
마음껏 속여 보아라
새벽에 한 잎
정오에 한 잎씩 떨어뜨려라
한 잎은 이 나무, 한 잎는 저 나무에서
자욱한 안개로 해돋이를 늦추고
이 땅을 자줏빛으로 흘리게 하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미 서리에 말라버린 
포도나무 잎새를 위해서라도
주렁주렁한 포도송이 상하지 않게
담을 따라 열린 포도송이를 위해서라도

시월 / 이문재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벗어던진다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시월 / 황동규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 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10월 / 토머스 베일리 올드리치
10월이 내 단풍나무 잎들을 금빛으로 물들였어요 
 이제 거의 떨어져 나가 여기 저기 한 잎씩만 남아 있네요 
머잖아 남은 잎들마저 힘없는 가지에서 떨어지겠지요 
죽어 가는 수전노의 손가락에서 동전들이 미끌어 떨어지듯 

시월 /이외수
이제는 마른 잎 한 장조차 보여 드리지 못합니다 
버릴수록 아름다운 이치나 가르쳐 드릴까요 
기러기떼 울음 지우고 떠나간 초겨울 
서쪽 하늘 
날마다 시린 뼈를 엮어서 그물이나 던집니다 
보이시나요 
얼음칼로 베어낸 부처님 눈썹 하나 

시월 / 기형도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 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개의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굴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그것을 잠시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 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追憶들은 갑자기 거칠어 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 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 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 였던 때가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시월 / 오세영 
무언가 잃어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있을 뿐이다.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 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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