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그대 쪽으로 / 기형도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단편의 잠속에서 끼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의 벽지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를 다 닦아내는 박명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 김용택 시인
들 국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뭐헌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 오는데 뭔 헛짓이다요 저런 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 걸리면 뭐헌다요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내 마음에 허연 서리만 끼어가고 저 달 금방 져불면 세상 길 다 막혀 막막한 어둠 천지일 틴디 병신같이, 바보 천치같이 이 가을 다 가도록 서리밭에 하얀 들국으로 피어 있으면 뭐헌다요, 뭔 소용이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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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하루 해가 떠서 다 지도록 천번 만번이나 당신을 떠났어도 도로 그 자리 나는 하루종일 당신 곁에 꼼짝없이 서 있었습니다.
** 안도현 시인
1970년대 편물점 단칸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하던 것처럼 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 척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 맛있게 양푼 밥을 누나들은 같이 비볐네 그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삶은 때로 머리채를 휘어잡히기도 하였으나 술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목 빼고 빗줄기처럼 우는 날이 많았으나
빗소리 듣는 동안 연못물은 젖이 불어 이 세상 들녘을 다 먹이고도 남았다네 미루나무 같은 내 장딴지에도 그냥, 살이 올랐다네 |
겨울 옆서
쫓겨난 교문 밖에서 세 번째 겨울을 맞습니다 그대의 하늘 쪽을 바라보는 동안 이 엽서에 퍼담을 수 없을 만큼 눈이 내렸습니다 보고 싶다는 말만 쓰려고 했습니다 눈 덮인 학교 운동장을 맨 먼저 발자국 찍으며 걸어갈 아이를 멀찍이 뒤에서 불러 보고 싶다는 말은 정말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사랑이여 그대와 나를 합하여 우리라고 부르는 날이 다시 올 때까지는 나는 봄도 기다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물
고여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가끔씩 두레박이 내려온다고 해서 다투어 계층상승을 꿈꾸는 졸부들은 절대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누군가 목이 말라서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은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다 새 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밤 기차를 타고
산모퉁이를 돌면서 기차는 쓴약 같은 기적소리로 울고 있었다 유리창에 눈발이 잠깐 비치는가 했더니 이내 눈송이와 어둠이 엎치락뒤치락 서로 껴안고 나뒹굴며 싸우는 폭설이었다 잠들지 않은 것은 나와 기차뿐 철기 옆 낮은 처마 아래 불빛 하나뿐 저기 잠 못 든 이가 처녀라면 기적소리가 멀어지면 더욱 쓸쓸해서 밤새도록 불을 끄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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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랑
그 여름 내내 장마가 다 끝나도록 나는 봉숭아 잎사귀 뒤에 붙어 있던 한 마리 무당벌레였습니다
비 그친 뒤에, 꼭 한번 날아가보려고 바둥댔지만 그때는 뜰 안 가득 성큼 가을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코 밑에는 듬성듬성 수염이 돋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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